‘0원’에 가까울수록 ‘영원’ 같은 자유 마주했다…런던 ‘0원살이’ 기록

최윤아 2022. 11. 1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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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핑, 스쿼팅…‘돈’ 아닌 ‘도움’으로 산다
“지갑을 닫았더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저자 유튜브 채널 ‘Blanket wearer’ 영상 캡처, 일러스트 저자 박정미,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0원으로 사는 삶
나의 작은 혁명 이야기
박정미 지음 l 들녘 l 1만9500원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인간의 ‘목줄’이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갈 수 있는 곳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시도해 볼 수 있는 도전이 달라진다. 돈은 인간 행동반경을 결정한다.

그런데 여기, 돈을 쓰지 않았더니 오히려 세상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0원으로 사는 삶>의 지은이 박정미(37)씨다. ‘0원살이’, 말 그대로 돈을 쓰지 않고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될 것만 같은데 그는 다른 말을 한다. ‘0원’에 가까워질수록 ‘영원’ 같은,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마주했다고.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서’라거나, ‘기후 변화를 저지하기 위해서’ 같은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사용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 스물아홉, 워킹 홀리데이로 떠난 영국에서 해고를 당했다. 통장 잔고는 300만원. 딱 두 달치 월세였다. 2평 남짓한 방에 누워 연거푸 한숨을 쉬는데 불현듯 오싹했다. ‘뭐야, 숨이 돈이야?’ 한숨을 토해내는 찰나의 순간에도 월세는 나갔다. ‘인생이, 시간이, 나의 존재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쓰이는 것이 당연한 거야?’ 소비하느라 노동하고, 노동하느라 소모되는 삶 외에 정녕 선택지는 없는 걸까.

작가는 ‘0원살이’를 결심했다. 소비를 멈추고, 노동을 멈춰 확보한 시간으로 현재의 ‘노동-소비’ 시스템 밖을 엿보기로 했다. ‘우핑’은 그 시작이었다. 우프(WWOOF·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는 자원봉사자와 유기농 농장을 연결하는 상호 교환 네트워크로, 봉사자는 무료 숙식을, 호스트는 일손을 제공받는다. 농장에서 키운 농작물로만 먹고, 오직 ‘손노동’만으로 농사를 짓는다. ‘오프 그리드’(off grid·중앙 정부의 에너지 공급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태양광 등으로 자체 생산)를 요구하고 일체의 석탄·석유 사용을 금지하는 더 엄격한 공동체 ‘팅커스 버블’에서도 머무른다. 일하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시스템 속에서 ‘0원살이’는 어렵지 않았지만 슬그머니 회의가 고개를 들었다. ‘평생 시골 농장에서 산다면 삶이 시시해지지는 않을까?’ ‘도망치듯 도시를 피해 사는 게 해답일까?’ 제한된 전력량 탓에 온수 샤워조차 어려운데 ‘이렇게 고된 환경에서 기꺼이 살아갈 수 있을까?’

지은이는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고 런던에 돌아온다. ‘살인적인 물가’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도시, 살고자 하는 청춘은 이미 보트에, 카라반에, 버려진 건물에 밤을 맡기고 있었다. 영국에만 1만5000명의 청춘이 약 3500㎞ 길이 운하 위에서 살아간다. 일명 ‘보트 피플’이다.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주인이 자리를 비운 빈 보트를 무상 임대한 저자는 보트살이를 체험하고, 내친김에 ‘스쿼팅’(squatting)에도 도전한다. 빈 건축물을 점거해 살아가는 스쿼팅은 영국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다. 상가용은 합법, 주거용 건물은 불법이다. 여군 장교 출신, 원칙주의자(로 보이는) 지은이는 절반의 불법성을 계속 의식하지만, 동료 ‘스쿼터’의 말에도 귀를 기울인다. 재개발을 염두에 두고 막대한 건물을 매입한 채 수년간 방치하는 부동산 개발회사와 개인투기자들이 상당하며,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쫓겨나고, 수많은 노숙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영국의 빈집은 65만채로 이 가운데 31만채는 6개월간 비어 있고, 영국엔 32만명의 노숙인이 있다.

영국에는 살인적인 월세 부담 탓에 ‘보트’에서 살기로 한 청년들이 1만5000명에 이른다. ‘집’이 된 보트의 외부·내부. 저자 제공

먹거리는 우리 선조처럼 ‘사냥’했다. 이른바 ‘스킵 다이빙’(skip diving). 쓰레기통(skip)에 몸을 던져(diving), 먹거리 등 유용한 물건을 줍는 행위다. 패스트푸드점, 대형 슈퍼마켓 등은 특정 시간에 재고를 처리하는데 이 현황을 파악하면 꽤 괜찮은 식사거리를 구할 수 있다. 스킵 다이빙을 하려다 하필 동포를 마주쳐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지은이는 가게와 기부 협약을 맺어 안정적으로 식사를 확보하는 제법 능숙한 다이버가 된다. “(스킵 다이빙은) 창피한 짓이 아니라, 버려진 음식을 ‘구조’하는 신나는 생계 활동이 되었다. (…) 런던에서의 ‘0원살이’는 쓰레기 덕에 가능했다. 버려진 집, 버려진 음식, 버려진 자전거…. 도시의 낭비는 나에게는 기회였다.”

저자가 ‘스킵 다이빙’으로 확보한 먹거리. 도시의 음식 쓰레기 배출 현황을 파악하면 돈 없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 몇몇 대형마트는 대형 쓰레기통을 지키는 가드를 고용해 이를 저지한다. 저자는 “낭비로 쓰레기를 만들고, 그 쓰레기를 지키느라 돈, 장비, 인력,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라고 꼬집는다. 저자 제공

지은이는 기증받은 낡은 자전거와 히치하이킹을 통해 독일, 폴란드,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그리스, 인도까지 다양한 나라를 여행한다. 운전자로부터 종종 “섹스?”라는 “불손한 요청”을 받지만 결과적으로 무사했다. “‘0원살이자’는 재워주는 사람, 먹여주는 사람, 태워주는 사람이 없으면 여행이 어렵다. 돈이 아닌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이다. 사람을 믿으면 위험하다고? 나는 위험해지지 않고자 사람을 믿었다.” 저자는 0원으로 ‘돈’ 대신 ‘도움’으로 살아가는 방법, 이 도움을 주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 방법, 나아가 존재의 연결성을 믿는 방법을 손에 쥐고 돌아온다. 프로젝트를 마친 뒤 2년 만에 열어본 지갑에는 30파운드(약 5만원)가 비어 있었다. 쓴 돈이 아니라 기부한 돈이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저자는 지리산의 빈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플렉스’(flex) 열풍에 뒤이어 당도한 ‘무지출 챌린지’ 유행, 저자는 이를 “긍정적 반동”이라 했다. 그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챌린저들이나 나나 먹고사는 어려움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점에 동질감을 느낀다”며 “단순히 유행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소비를 줄이는 게 다른 존재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는지도 함께 알아가면 더 좋겠다”고 했다. ‘무지출’이 ‘무경험’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예산이 정해져 있으면 오히려 그게 한계가 되죠. 그런데 0이 되면 제한이 없어져요. 무엇을 진짜 원하는지, 그걸 해낼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모험이 되고 그 과정에서 무한한 기적들이 옵니다. ‘Zero(0원) to Eternity(영원)’는 가능합니다.”

저자가 영국 웨일스 ‘라마스 생태마을’을 가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이곳에서는 오직 두 손으로, 흙집을 짓는다. 저자 제공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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