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자본주의 악폐 너머 새 나라 열망한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 문학과 사상 입체적 탐사
해방기 민족국가 건설 활동 주목
근대 극복 지향한 실천적 지식인
김기림 연구
근대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김유중 지음 l 월인 l 2만3000원
김기림(1908~1958)은 1930년대에 서구 모더니즘 문학 사조를 이 땅에 소개하고 그 모더니즘의 영향 속에서 창작 활동을 한 일제강점기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다. 그런가 하면 해방 정국에서 왕성한 정치적·문학적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직후 납북돼 긴 세월 금기의 영역에 갇혔던 인물이기도 하다. 김기림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이후에야 본격화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김기림 연구는 모더니즘 운동 시기에 집중돼 있었고, 해방 뒤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국문학자 김유중 서울대 교수가 쓴 <김기림 연구>는 이런 연구 관행에서 벗어나 모더니즘 시기부터 해방 정국까지 김기림의 문학과 사상과 활동을 입체적으로 살핀 연구서다. 특히 지은이는 해방 뒤 활동을 모더니즘 시기에 형성된 사상 속에 일관성 있게 파악함으로써 김기림 문학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김기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는 1930년대 중반에 발표한 <기상도>다. 그동안 <기상도>는 문학적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은 작품, 심지어는 실패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런 평가가 <기상도>에 담긴 세계관과 문명관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성급한 독해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기상도>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이 작품의 바탕에 깔린 시인의 시대 인식과 역사의식을 명확히 보아야 한다. 특히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를 이루는 ‘태풍’의 의미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이해를 거쳐서 다시 볼 때 이 작품은 시인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회심의 역작이자 일생일대의 야심작”으로 드러난다.
<기상도>는 전체 7부 426행의 대작이다. ‘기상도’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 상황을 알려주고 미래를 예측해 보여주는 지도를 뜻한다. 이 기상도의 이미지로 시인이 이야기하려는 것이 국제 정세의 변화 양상, 특히 ‘근대’라는 시대가 이룬 문명의 향방이다. 시의 묘사는 태풍이 몰려오기 전의 여유로운 상황에서 시작해 태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뒤의 상황으로 끝난다. 태풍은 남태평양에서 북상해 ‘아시아 연안’을 강타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지은이는 이 태풍을 전쟁 곧 다가올 세계대전으로 해석한다. 당시 김기림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하여 몰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인식 속에서 국제 정세를 보았고, 자본주의 위기가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전면전 곧 세계대전을 통해서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근대 문명이 자기모순의 격화로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문명관 속에서 작품을 쓴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기상도>가 이런 몰락과 파멸에 대한 예고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제7부 ‘쇠바퀴의 노래’는 태풍이 문명을 휩쓸어버린 뒤에 열리는 새로운 시대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그런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태풍이 짓밟고 간 깨어진 메트로폴리스에/ 어린 태양이 병아리처럼 홰를 치면 일어날 게다”라는 시구다. 병든 문명이 쓸려나간 자리에 새로운 문명의 아침이 오리라는 전망이다. 지은이는 당시 김기림이 모더니즘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에도 깊이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이런 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지은이의 이런 해석은 김기림이 모더니즘 운동을 벌이던 시기에도 모더니티 곧 근대성을 긍정하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말이 되면 김기림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사조를 극복해야 할 것으로 선언하게 된다. 이런 사상적 시야를 품고 있었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1940년대에 일제에 투항한 것과 달리 고향 함북 경성으로 돌아가 침묵으로 자신을 지켰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책은 <기상도>에 나타난 김기림의 문명관과 역사관이 해방 직후 정치적·문학적 실천으로 이어졌음도 알려준다. 김기림은 해방과 함께 좌파 계열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고 서울시위원장으로 활동한다. 이 시기 김기림의 사상적 지향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1946년 2월 ‘우리 시의 방향’이라는 전국문학자대회 강연문에 나타나 있다. “오늘 전후의 세계는 ‘근대’의 결정적 청산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실패한 근대’의 반복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는 이 땅에서부터 출발하려 한다. 또 출발시켜야 한다.” 근대 문명을 보는 <기상도>의 관점이 해방 뒤 활동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김기림이 중도 좌파의 지도자 여운형과 함께 좌우 통합 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김기림은 좌우 양파가 힘을 합쳐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고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보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지은이가 주목하는 것이 김기림의 민족 개념이다. 김기림은 좌익과 우익이 상대를 향해 ‘반민족’이라고 비난하던 당대의 혼란을 극복하려면 민족이라는 범주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김기림의 해법은 민족의 중심에 ‘인민 대중’을 놓는 것이었다. 민족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민 대중’이야말로 새 시대를 열어나갈 민족의 중추다. 동시에 김기림은 이 민족의 범주에서 매국 매족을 일삼은 친일파와 인민을 지배·착취하는 특권층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악질 친일파와 소수 특권층을 제외한 인민 대중의 나라가 김기림이 꿈꾼 새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운형이 1947년 7월 암살당함으로써 좌우 합작 노선은 길을 잃었고 김기림의 정치적 활동도 힘을 잃었다. 여운형 장례식장에서 김기림은 추도시를 읽었다. “그러기에 당신의 이름과 함께 인민이 부르는 만세 소리는/ 가슴과 배짱에서, 아니 발톱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울려나왔다/ 당신은 벌써 당신 자신이 아니요/ 모-든 인민의 당신이었다.”
이 책이 다시 그려낸 초상을 통해 김기림은 서구 모더니즘에 심취한 예술가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파멸과 식민 지배의 종말을 예견한 문명비평가이자 근대의 악폐를 극복한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당대의 과제로 삼아 행동한 실천적 지식인이었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기림은 “우리 지성사와 문학사에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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