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묵묵] 주택의 아래와 위에서 살다

기자 2022. 11.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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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로부터 10여일이 지났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참사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내 안에 있나 싶을 정도다. 처음 이삼일은 기사를 열심히 검색하면서도 제목만 보았을 뿐 본문까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족이나 생존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열흘간 제정신이었던 것은 정부관료들과 보수언론뿐이었던 것 같다. 법적 책임을 모면하고 정치적 위기를 차단하는 데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작가인 스탕달은 훌륭한 철학자가 되려면 돈 많은 은행가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했다. 바로 사태를 냉정하게 보는 것이다. 어디 철학자만 그럴까. 세상을 살 만하게 바꾸고자 한다면, 아니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게 만들고 싶다면, 돈을 세는 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냉정함을 가져야 한다. 희망에서 생겼든 절망에서 생겼든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돈을 세면서 입발림을 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가 센 돈을 다시 세어보는 것이다. 입발림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더욱이 상대가 과거에도 말로 ‘퉁치고’ 어벌쩡 넘어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일수공책을 내미는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내가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빈곤사회연대의 활동가 덕분이다. 그는 내게 공공임대주택과 관련된 올해 정부예산안을 살펴달라고 했다. 문제를 여기저기 좀 알려달라는 뜻이다. 나 같은 싸구려 앰프라도 빌리겠다고 나선 것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무감각한 시간 속에서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될까봐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취약계층을 주택정책에서 배제

공공임대주택은 공적자금을 투입해 소위 거주취약계층의 사람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임대해주는 주택이다. 주택의 지하나 옥상 혹은 고시원처럼 주택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거주취약계층은 서울에만 30만가구가 넘는다. 그런데 정부가 이들에게 필요한 공공임대주택 관련 예산을 올해 대비 5조7000억원가량 삭감한 안을 내놓았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 안정을 위한 장기공공임대주택의 경우에는 융자 예산이 37%, 출자 예산이 19%나 삭감되었다.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대신 공공분양주택과 민간임대주택 관련 예산을 늘렸다. 예산을 통해 추정컨대 공공임대주택 공급은 6만5000호 가까이 주는 반면 공공분양주택과 민간임대주택은 6만9000호 정도 늘어난다. 말하자면 공공분양주택과 민간임대주택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을 줄인 셈이다. 그런데 민간임대주택은 임대료 책정이나 입주자 선정기준에 대한 규제가 없으며, 공공분양주택을 분양을 받으려면 최소 수천만원의 자기자금과 수억원에 이르는 원리금상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아닌 것이다. 한 연구보고서가 지적한 것처럼, 이번 예산안에는 지원주택 유형을 “임대주택에서 분양주택으로, 공공에서 민간으로” 바꾼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주거취약계층을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주거정책에서 배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홍정훈, <2023년 공공임대주택 예산안 분석>).

주택전문가도, 예산전문가도 아닌 내가 공공임대주택 관련 예산안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지난여름의 비극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8일 서울에 집중 호우가 내렸을 때 신림동의 반지하방에서 일가족이 희생된 일이 있었다. 그때 구두 신고 길가에 쪼그려 앉아 반지하방을 내려다보며 서울시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대통령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대통령이 시민에게 일어난 참사를 구경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퇴근하면서 보니 벌써 다른 아래쪽 아파트들은 침수가 시작되더라”는 말이 그런 인상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때의 인상은 이번 참사 때 파출소 옥상에 올라가 참사 현장을 내려다보던 경찰서장이나 “인파가 많아 걱정된다”면서도 그냥 퇴근한 구청장에 대한 인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이 이번 참사를 두고 대노했다는 이야기나 정부가 근본 대책을 마련한다는 이야기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반지하방의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부는 주거취약계층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 내놓은 정부의 예산안에는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관련 예산이 무더기로 삭감되어 있었다. 8월8일에 다짐한 것을 8월30일에 뒤집어버린 셈이다.

말로는 근본대책, 돈으론 무대책

말로는 걱정인데 행실은 퇴근이다. 말로는 근본 대책인데 돈으로는 무대책이다. 말을 믿을 것인가, 행실과 돈을 믿을 것인가. 스탕달이 말한 은행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일수공책을 확인하고 그가 센 돈을 다시 세어보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아니라면 주택의 아래와 위, 지하와 옥탑, 소위 지옥을 벗어날 수가 없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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