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안전, 마약, 경호…참사 낳은 열쇳말

기자 2022. 11.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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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서와 같은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쉽다. 여태껏 했던 것처럼 하면 된다. 80명 정도의 1개 기동대만 배치해서 행렬의 원활한 흐름만 확보하면 된다. 늘 해오던 일이니 어려울 게 없다. 다만 2022년 10월29일만 예외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한국 경찰은 100만명이 넘는 인파도 안전하게 관리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 최루탄 한 방 쏘지 않아도 된다. 시민 역시 경찰의 안내를 잘 따라준다. 거친 말이 오가는 집회는 많지만, 폭력집회나 행정안전부 장관이 말하는 ‘소요’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이태원 참사 이후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이례적인 일탈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까닭을 짚는 게 핵심이다. 이를 위한 열쇳말은 ‘안전’ ‘마약’ ‘경호’다.

안전.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공직사회의 안전 의식은 느슨하게 풀어졌다. 대통령부터 안전을 도외시했다.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를 버리라는 등의 말을 곧잘 쏟아냈다. 일찍이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 유출이 안 되었다거나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이라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안전을 무시하는 망언을 잇달아 쏟아냈다.

그러니 대통령의 말이 공직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게 핵심 관건이다.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공직사회를 움직이는 건 대통령 등 권력자들의 말이다. 대통령이 안전을 하찮게 여기면, 어디서든 탈이 날 가능성이 커진다.

마약. 안전을 경시하는 대통령의 말이 빗장을 풀었다면, 마약에 대한 언급은 경찰 대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약범죄가 심각하다는 어떤 통계도 없는 상황인데 대통령은 불쑥 마약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참사 8일 전 열린 경찰의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고 강조했다. 사흘 뒤 총리와 만나서도 마약과의 전쟁을 강조하며 ‘특단의 대책’을 주문했다. 정부와 여당은 대통령의 주문을 따라 10월26일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당정협의회를 열었다. 참사 하루 전,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이태원 일대 핼러윈 마약 단속 인력을 3배 이상 늘리라고 지시했다. 장애인 시위에 대해 지구 끝까지 쫓아가겠다던 사람의 구체적인 지시였다. 경찰에게 이태원은 ‘마약과의 전쟁’에서 실적을 내야 할 공간이었을 뿐이다.

경호. 대통령은 매일 출퇴근을 한다. 대통령의 출퇴근을 위해 서초, 방배, 용산 등 3개 경찰서의 인력이 동원되는데, 가장 큰 부담은 용산서의 몫이다. 경찰의 경호는 만일에 다시 만일을 곱할 정도로 걱정을 일삼는 특성이 있다. 대통령 행차 한참 전부터 수백, 수천 명의 경찰관을 동원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한다. 경찰 지휘부는 가장 중요한 경찰활동이 대통령 경호라며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런 일을 하루에 두 번씩 반복하면 누구나 녹초가 된다.

참사 당일에는 대통령실 주변으로 시위대가 행진해오고 있었다. 평온한 시위였지만,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으로 경찰의 경호, 경비 활동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휴일도 반납하고 저녁도 거른 채, 경찰 전체가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활동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태원에서 아무리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쳐도, 실시간으로 녹음이 되는 112신고를 통한 주권자의 구조 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다.

이태원 참사의 직접적 책임은 당연히 경찰에게 물어야 한다. 112신고가 빗발쳐도 도로 통제라도 해달라는 소방의 요청에도 묵묵부답이었던 것은 명백한 범죄였다. 그러나 평소엔 제 역할을 곧잘 하던 경찰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은 경찰만의 책임이 아니다. 경찰을 ‘마약과의 전쟁’으로 내몰고, 온통 대통령도 없는 대통령실 주변 지키기에만 골몰하게 했던 책임도 분명히 따져야 한다.

경찰을 통제하겠다며 행안부에 경찰국을 새로 만들었던 행안부 장관은 이제 와서 치안은 행안부 소관이 아니라고 발뺌한다. 장관이 뭐라 발뺌하든 국가의 안전활동의 주무부서가 행전안전부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행안부, 서울시, 용산구의 역할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정부가 자초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런데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공직자는 한 명도 없다. 무능, 무책임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하다. 대통령실 수석이 쓴 필담이 그들의 태도를 단박에 보여준다. “웃기고 있네.” 이 다섯 글자는 웃기지 않고 오히려 살벌해 보였다. 외신기자들에게 보여준 국무총리의 웃음이 소름 끼쳤던 것처럼.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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