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글씨’ 새긴 광화문 바윗돌, 文정부가 쓰레기장에 내버렸다

유석재 기자 2022. 11. 11.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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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표석 유기(遺棄)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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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종로 사거리에서 광화문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두 건물이 나란히 자리잡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건물 중 오른쪽에 있는 것이 철통 같은 보안으로 지나갈 때마다 적잖은 위화감을 주는 주한 미국대사관입니다. 그럼 그 왼쪽 건물은 무엇일까요. 리모델링을 거치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원래 똑같이 지어진 쌍둥이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2009년 서울 광화문광장 동쪽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청사(왼쪽)와 미국 대사관 건물(오른쪽)은 성격이 다른 건물인데도 색깔만 다를 뿐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다. 이 두 건물과 그 자리는 우리 현대사의 온갖 사연들이 농축돼 있는 곳이다.

왼쪽 건물 자리는 조선시대에 육조 중 하나인 이조(吏曹) 건물이 있었던 곳이고, 오른쪽 건물 터에는 서울시청 격인 한성부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이 건물들은 모두 헐렸고, 1915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분실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1921년에는 경찰관 강습소로 바뀌었죠. 이 건물은 6·25 때 파괴됐고, 그 자리는 공터가 됐습니다.

당시 이 공터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했던 연날리기 대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흙바닥 위에 가마니를 깔고 행사를 치렀다고 하니,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한 저개발국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새 건물 두 채를 짓게 된 것은 1959년의 일이었습니다. 옛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은 전쟁으로 내부가 불타고 부서져 당장 활용하기 어려웠고, 1954년부터 새 정부청사 신축 계획이 마련됐는데 바로 이 공터가 그 자리로 지목됐습니다.

1956년 제1회 연날리기대회.

공사비는 대외원조자금으로 충당됐고, 설계와 시공은 미국의 태평양건축 엔지니어(PA&E)와 빈넬(Vinnel)사가 맡았습니다. 왼쪽 건물은 정부청사, 오른쪽 건물은 주한 미국 경제협조처(USOM) 건물로 지어졌습니다(1968년 미 대사관이 됐습니다). 두 건물이 똑 같은 모습인 것은, 미국 측이 자기들 건물을 설계하는 김에 옆 건물까지 동일하게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하 없는 지상 8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루이 말 감독의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에도 주요 무대로 나오는 1950년대 세계 건축계의 지배적 양식이었습니다. 당시 빈넬사 주임기사로 이 두 건물의 건축을 주도한 사람은 한국인 건축가 이용재씨였다고 합니다.

건물 공사 중에 5·16이 일어났고, 그해 건물이 완공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왼쪽 건물에 먼저 들어섰습니다. 1963년 경제기획원이 입주한 뒤에는 경제개발 5개년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주요 경제 정책이 수립된 현장이었습니다. 1986년 문화공보부가 들어선 이래 최근까지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이었습니다. 10여년 전쯤 이곳 기자실에 가끔 들르면(그때나 지금이나 문체부 기자실에 아무리 있어 봐야 좀처럼 기삿거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지나가다 들른 유인촌 장관이 어깨를 툭 치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라고 한마디 던지고 가곤 했죠.

그런데 이 건물은 바로 이 대통령 시기에 결정적 전기(轉機)를 맞게 됩니다.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재임 2008~2013)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이틀 앞둔 2009년 2월 23일 청와대에서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을 접견하던 중 웃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왜 굳이 ‘제17대’와 재임기간을 썼느냐면, 기이하게도 역대 전직 대통령을 떠올릴 때 그다지 금세 생각나지는 않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MB는 재임기간 중 최소한 서울 광화문 일대에 큰 족적 하나는 남겼습니다.

바로 ‘미 대사관 왼쪽 건물’에 자리잡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입니다. 2009년 8·15 경축사에서 MB는 이런 말을 합니다.

“6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근대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기적의 역사를 후손들이 배우고 민족적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2009년 4월 16일 청와대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이 소설가 황석영(왼쪽)씨와 국립대한민국관(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 초청 간담회장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그곳에 건립됩니다. 2010년 11월 착공해 2012년 12월 26일 개관했습니다. 당시 취재를 맡았던 곽아람 기자는 신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박물관이 아닌 정권 치적 홍보관” “졸속 개관” 등 일부에서 제기한 시각 편향 논란을 의식해 최대한 균형을 맞추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1961~1987년)을 다룬 제3전시실이 대표적. 새마을 운동 코너 옆에 유신 반대운동 자료 등을 모아 ‘시민 사회의 성장과 민주주의’를 다룬 진열장을 마련하고, 바닥엔 조명으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등 민주화 구호를 쏘았다. 김왕식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균형적 역사시각으로 경제발전, 민주화 등을 기록하려 했다”고 강조했다. 옛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을 리모델링해 건립한 박물관 건물은 지상 8층 규모. 4개의 상설전시실, 2개의 기획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MS 허브존에서 바라본 미국 대사관과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정면으로 보이는 녹색 건물).

이미 박물관 개관 일주일 전인 12월 19일 있었던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지만 여전히 MB의 임기 중이었습니다. 첫 국립 현대사 박물관을 서울 한복판에 건립했다는 적잖은 의미가 있는 박물관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야말로 그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애정도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 박물관의 표석(標石)에 직접 글씨를 썼습니다. 사실 전국에 그 필적이 꽤 많이 남아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달리 MB의 서예 작품이 공공시설에 남아있는 것은 드문 편입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라는 아홉 글자를 훈민정음을 연상케 하는 고졸한 글씨체로 쓰기 위해, 그는 청와대에서 무척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필을 새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표석. 2019년 2월 철거됐었다. /연합뉴스

그리고 그의 글씨를 새긴 표석이 박물관 앞에 세워졌습니다. 아래엔 역시 MB의 글씨로 ‘이천십이년십이월이십육일 대통령 이명박’이라고 새겨졌습니다. 그렇게 크거나 어마어마한 규모는 아니었고, 폭 90㎝, 높이 50㎝의 아담한 사이즈였습니다.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는 하되,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쯤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이 글은 MB나 MB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숱한 정치적인 논란에도 불구하고 ‘MB가 첫 국립 현대사 박물관을 지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 사실은 흔적으로 남겨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이 사실마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으로서 개관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박근혜 정부 때는 별탈없이 운영됐습니다. 하지만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그해 7월 김용직 관장이 임기 6개월을 남기고 사직서를 냈습니다. 외압이 있었다는 후문입니다.

그리고 새 관장에 취임한 인물은, 주진오 상명대 교수였습니다.

주진오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재임 2017~2021).

“아! 정말 이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탄식을 내뱉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좌파 역사학자 중에서도 ‘강성’으로 꼽히는 인물이고, 과거 좌편향 역사서라는 논란을 빚었던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의 필자였습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과연 무엇이 문제였는가, 조금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48년 12월의 유엔 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는 사실에 유의한다”는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무시하고 ‘38도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서술.

-’대한민국과 북한 정부의 수립’이란 제목 아래 남·북한을 동격으로 서술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의미를 약화시킴.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서술하면서 농민에게 실질적으로 토지를 준 것이 아니라 경작권만 준 사실을 설명하지 않음.

-주체사상 등에 대해 북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서술한 부분이 있음.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누락했다는 지적을 받음.

천재교육 교과서 등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들의 좌편향 서술 문제점을 분석한 조선일보 2013년 9월 23일 조선일보 기사.

이 인물을 ‘굳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관장으로 임명했다는 것에서 문재인 정권의 의도는 명확해 보였습니다. 사실 이 박물관이 처음 생길 때부터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한국현대사의 서술과 교육을 놓고 좌·우의 치열한 이념 갈등과 역사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파 정부가 현대사박물관을 세운 다음 좌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훼손하는 좌편향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주진오 관장의 임명으로 이 우려는 현실화됐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만약 정부가 주진오 관장에게 그런 ‘박물관 좌편향’의 임무를 맡긴 것이 사실이라면, 그 임무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는 2021년 5월까지 관장직을 수행했는데, 초기에는 2018년 4·3 특별전에서 ‘남로당 포고문’을 크게 내거는 등의 전시로 물의를 빚었고, 상설전시관을 개편하면서 ‘한강의 기적’은 대폭 축소하고 ‘여순사건’ ‘촛불집회’를 추가하겠다는 용역 보고서를 제출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 개편된 상설전시관은 끝내 ‘대한민국의 성공한 역사를 전시한다’는 박물관의 기본 틀을 뒤엎지는 못했습니다. 박물관 기존 인력이 관장의 지시 사항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한 결과라고 합니다.

남로당이 4·3무장반란을 일으키면서 배포한 ‘반미구국 투쟁에 호응 궐기하자’는 호소문. 2018년 4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특별전 전시장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위치에 크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주진오 전 관장은 누가 봐도 ‘정치적 편향’으로 읽힐 수 있는 유별난 행보를 몇 차례 했던 것이 최근 밝혀졌습니다. 2018년 친여 성향 매체인 ‘미디어 몽구’의 영상 전편(全篇)을 소장품의 하나로서 구입하라고 지시해서 직원들을 곤혹스럽게 한 일이 그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취재해 지난 3월 인터넷 기사로 단독 보도했습니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03/22/VULQHOPW6VGRTH3XMGWGE4GIXE/

미디어 몽구는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시위, 성주 사드 배치 반대 시위 등을 촬영해 올린 매체입니다. 결국 ‘규정상 유물 구입은 경매나 공고 등을 통한 공개 구입 밖에 할 수 없어 소장자로부터 직접 매입할 방법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유물 구입은 무산됐습니다.

현재 '미디어 몽구'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

그리고 또 하나의 행보가 이것이었습니다.

‘MB 표석’ 철거.

2019년 2월 20일, 박물관 앞에 그때까지 멀쩡하게 있던 이명박 대통령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표석을 갑자기 치웠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과거사 청산의 일환이 아니냐”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 기념물인 표석을 왜 치우느냐”는 지적이 일자 박물관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전으로 관람객이 갑자기 늘어 민원이 생기자 안전상의 문제로 표석을 수장고로 옮겼다.”

그 후로 표석의 존재는 잊혔습니다. 이것은 MB가 사실상 ‘잊힌 전직 대통령’이 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2020년 1월 8일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연합뉴스

하지만 몇 달 전, 저는 박물관 내외 복수의 관계자들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관람객이 많아 옮겼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민원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는데다, 그 정도 크기의 표석 때문에 안전상의 문제가 생겼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주진오 관장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표석을 치우라’는 지시를 내렸던 거예요.”

제가 반문했습니다. “아니 그럼… 표석을 수장고에 보관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수장고는 무슨, 그것도 다 거짓말이었어요.”

원래 자리에서 뽑아낸 표석을 지게차에 실어 박물관 건물 뒤편 하역장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한 관계자는 “표석 밑바닥이 흙으로 오염된 채 한 달 넘게 천에 싸인 채 쓰레기와 함께 하역장에 방치돼 있었다”고 제게 털어놨습니다. 아무런 표시도 없으니, 청소차가 잘 모른 채 표석을 싣고 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는 얘기였습니다.

표석이 하역장에 있었던 기간은 한 달이 넘었습니다. 3월 27일, 마침 근처에 있던 언론사 기자 한 명이 산책 도중 우연히 ‘표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박물관 측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렇게 둘러댔습니다.

“아, 그 표석... 말씀이세요? 그거 지금 수장고에 있어요.”

다음날인 28일에 관련 보도가 나오자 주 관장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하역장에 있던 표석을 부랴부랴 6층 수장고로 옮겼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끝나기 전까지 청와대나 문체부의 그 누구도 ‘왜 그걸 계속 수장고에 두고 있느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거 없는 방치였습니다. 박물관에서 수장고(收藏庫)란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인데 그 표석은 전시를 위한 유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표석은 2년 넘게 지난 2021년 4월에야 MB의 원래 글씨가 담긴 액자와 함께 공공기록물법상 행정박물(行政博物)로 등록했다고 합니다.

수장고로 옮긴 'MB 표지석'을 '행정박물'로 처리하려 했던 2021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내부 문서. /유석재 기자

공무원이 아닌 일반인이라면 들어볼 일도 거의 없을 ‘행정박물’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공공기관이 업무 수행과 관련해 생산하고 접수·취득한 형상기록물 중 가치가 높아 관리 대상으로 선정한 기록물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예 국가기록원으로 넘길 수 있는 길을 열어 둔 셈입니다. 보기 싫은 표석을 영영 치워버리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임기 2년의 주진오 관장은 한 번 연임한 뒤 표석의 행정박물 등록 다음달인 2021년 5월 관장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뜻밖에도 박물관 내부 승진 격으로 후임 관장이 된 남희숙 현 관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인물입니다. 저는 이 시점을 ‘문재인 정부가 현대사 박물관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뜻을 완전히 포기한 때’로 해석합니다.

제가 취재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은,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이 박물관은 ‘박물관의 역사를 대변하는 이 표석을 원위치에 돌려놓는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독 기사를 쓴 것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특별전 ‘다시, 연결’의 개막과 함께 표석을 제자리에 놓은 9월 7일 아침 신문 문화면이었습니다.

그때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신문에 기사가 나면, 박물관은 곧바로 표석을 원위치시켰음을 공표하는 보도자료를 낼 것이다. 그러나 MB가 정말로 인기 없는 전직 대통령이 맞다면, 사람들은 이 기사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다른 언론들은 보도자료에 의존한 기사만 쓸 뿐 그것이 지난 3년 반 동안 왜 철거됐었는지 더 이상 취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2022년 9월 7일 아침, 원위치에 복귀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MB 표석'. /유석재 기자

기사가 나간 뒤 사람들이 제게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거 정말 MB 글씨 맞아요?”

전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맞아요. MB 글씨... 확인하고 쓴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리곤 간혹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역사란 건 말이죠...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닙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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