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마음치유] 애도란 무엇인가

2022. 11. 10.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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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인간이 거친 세상에서 길 잃지 않고 살아가려면 숭고한 목표가 꼭 필요하지만 그걸 이루리란 보장은 없으며 대개의 삶은 그곳 언저리를 맴돌다 끝난다.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산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일 테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먼저 떠나버린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꼭 눈에 띄는 행동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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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고 자책하고 분노해도 위로 안 돼
슬픔 함께 느끼며 슬픔에 함께 머무는 일
나약한 인간이 거친 세상에서 길 잃지 않고 살아가려면 숭고한 목표가 꼭 필요하지만 그걸 이루리란 보장은 없으며 대개의 삶은 그곳 언저리를 맴돌다 끝난다.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산다. 달 표면을 제 발로 밟아보려고 쉬지 않고 걸어가는 여행자처럼 말이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일 테다.

온 세상을 슬픔에 빠뜨리는 사건이 터지면 진료실 장면이 달라진다. 지난 2주가 그랬다. 한동안 평온했던 기분이 다시 우울해지고, 끔찍한 이미지가 떠올라 잠이 안 오고, 자기 잘못도 아닌데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조문 다녀온 뒤 불안증이 악화하고, 익숙했던 길도 공포 때문에 돌아서 간다며 여러 환자가 호소했다.

사건 소식을 계속 듣지 않으면 자신이 무정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 괴로운데도 뉴스를 찾아봤다는 이가 있었다. “텔레비전 보지 마세요. 사진도 보지 마세요. 정 궁금하면 활자로 된 기사를 보세요”라고 조언했더니 그는 뭔가 탐탁찮은 듯해하며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먼저 떠나버린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꼭 눈에 띄는 행동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돌아가신 분들이 평온히 안식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지 않을까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고로 배우자를 여읜 여성이 찾아왔다. 계절이 한 번, 두 번 변해가는데도 슬픔의 무게는 줄지 않았다. 이제는 살아갈 기운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충격과 슬픔에 압도되어 있어서 그녀가 겪은 일을 세세히 묻지 않았다. 비록 직접 듣지는 못했어도 그녀에게 닥친 불행을 신문 기사로 얼마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묻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게는 팩트를 아는 것보다 슬픔이라는 경험을 함께 느끼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삶은 예상치 못한 사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사건은 이미 일어난 사실, 즉 팩트다. 팩트는 달라지지 않지만 경험은 변한다. 팩트를 어떻게 느끼고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경험은 바뀐다. 팩트는 과거형이고 경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충격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는 팩트가 어떤 경험으로 치환되느냐에 달렸다. 이런 변화는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일어난다. 타인이 “슬픔에 더 이상 빠져 있지 마세요”라거나 “당신에게는 불행이 찾아왔지만 그걸 계기로 이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거예요”라며 경험을 억지로 심어 넣을 순 없다.

그녀는 불안했고, 후회하고 자책했다. 때론 원망하며 분노했다. 슬픔이 다른 모든 감정의 뿌리였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어요”라고 불안을 내비쳤을 때도 ‘슬픔을 감당 못해 불안해하는구나’라며 나는 그녀의 슬픔이라는 경험에 머물러 있었다. “하느님이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죠”라고 원망해도 ‘슬픔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구나’라고 해석했다. 핵심 감정에서 벗어나 “당신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주다니 저도 신에게 화가 나네요”라며 분노하는 것이 애도일 수는 없다. 애도는 슬픔을 함께 느끼며 슬픔에 함께 머무르는 일이다.

슬픔은 슬픔이어야 한다. 후회하고 자책해도 슬픔은 남는다. 원망해도 슬픔은 그대로다. 분노가 슬픔을 대신할 수 없다. 슬픔은 오직 슬픔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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