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따라 바뀌는 재난 소관…‘재난 거버넌스’ 또 오작동[왜 또 참사인가]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후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 수립
MB 때 NSC에서 행안부로
박근혜 때 국민안전처 신설
문재인 땐 ‘위기관리센터’로
“현장 경찰관이 애썼다는 건
관련 기관들 허술함의 방증”
안전, 기본권으로 인식해야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몰릴 것 같다던지 하는 정보를 경찰, 일선 용산서가 모른다는 것은 상식 밖이다. 이태원 참사가 제도가 미비해서 생긴 것인가. 저는 납득이 안 된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안전시스템점검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의 책임 주체로 경찰을 지목하고 강하게 질타했다.
10일 경향신문이 취재한 재난·안전 전문가들은 용산경찰서와 용산구청 등 일선 안전 담당자들의 미흡한 대응이 이번 참사의 주된 배경이라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적 재난 컨트롤타워’의 부재라고 지적했다. 재난 대응을 지휘하는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대통령실에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참사는 위험 인지를 통한 사고 예측부터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전문가들은 “후진국형 사고가 아니다”라고 했다. 국가의 재난 안전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됐다면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윤명오 서울시립대 재난과학과 교수는 “위험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게 가장 큰 문제”라며 “골목 진입 인원을 막고, 진입한 인원은 가능한 한 넓은 방향으로 빼내는 등 정상적인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았다”고 했다. 윤 교수는 “현장 경찰관이 애를 썼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관련 기관이 얼마나 허술하길래 개인의 희생과 봉사 정신에 입각해서 일이 돌아가야 되느냐는 뜻”이라며 “용산지역을 담당한 경찰과 구청이 위험을 인지하고 군중 통제 대책을 확립한 뒤 가동시켜야 했지만 방심으로 사고가 발생했다”고 했다.
이준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전 대비계획이 없어 인파를 예측한 뒤 보행 흐름을 유지시키지 못했고, 소방로 확보가 미리 되지 않아 구조대가 현장에 빨리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연구위원은 “재난 대응 가이드라인의 수준은 높지만 상부에 보고한 뒤 지시를 받아 조치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며 “보고 중심의 매뉴얼 때문에 행동과 조치가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문현철 숭실대 재난안전관리학과 교수는 “용산구에서 발생한 문제는 일단 기초지방자치단체인 용산구가 대응하고, 벅차면 서울시와 행안부가 도와줘야 한다는 게 법 내용”이라며 “기초지자체의 재난관리가 잘 되고 그게 모여서 국가의 안전관리가 돼야 하는데 (정부는) 행사 주최가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와 같이 대규모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사고는 일선 경찰이나 구청, 소방서 차원이 아니라 재난 안전 체계의 컨트롤타워에서 위험을 모니터링하고 즉각적으로 인력 운용을 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재난 전문가는 “정상적인 시스템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재난 상황은 파출소나 소방서가 최선을 다해도 대응하기 힘들다”며 “그래서 어느 나라건 컨트롤타워인 최고위층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대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부처 간 벽이 높고 윗선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경직된 공무원 조직의 경우 권한도 갖고 책임도 지는 컨트롤타워의 정무적 판단이 중요하다. 다른 안전 전문가는 “위험성 평가에 따라 막대한 위험이 나타날 때 기본적으로는 소관부처가 담당하겠지만 행정적 판단을 해줄 곳이 필요하다”며 “많은 국민이 일시에 죽는 참사가 발생한 비상상황이라면 경찰청장과 행정안전부 장관을 거칠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실이 빨리 움직여야 하고, 평소에 그런 비상보고 체계와 위기관리 매뉴얼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는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후 노무현 정부 때 수립된 뒤 정권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노무현 정부는 포괄적 위기관리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통일·외교·안보 현안과 함께 안전·재난도 다루게 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시스템을 폐지하고 재난 대응을 행안부에 맡겼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안전처를 만들었지만 역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 지하벙커에 있던 위기관리센터에서 재난 대응을 주관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위기관리센터 기능이 유명무실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온다. 이번 참사에서는 정부가 지역의 위험요소를 잘 아는 시민·상인, 전문가 등과 함께 논의하는 ‘재난 대응 거버넌스’도 작동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생명·안전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음에도 정부가 생명·안전을 여전히 뒷전으로 인식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철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을 강조하고 재난 보고 체계를 갖춘다고 했지만 제대로 내면화되지 않았던 게 이번 참사로 나타난 것 같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 태도 등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점이 많다”고 했다.
김혜진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는 집회·시위에 경찰을 투입하면서 이태원의 대규모 인파에는 신경쓰지 않은 정부 행태를 비판했다. 김 공동대표는 “정부는 여전히 안전을 소요나 시위에 대한 통제, 억압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시민들이 생명 위협 없이 생활하게 할 것이냐는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했다.
안전권을 시민의 기본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헌법 제34조 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문언 그대로 ‘노력해야 한다’고만 돼 있을 뿐 안전권을 권리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발표한 헌법 개정안에서 “모든 국민은 안전하게 살 권리를 가진다”는 제37조 1항을 신설하고 2항으로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해 생명·안전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대책 마련을 ‘수사 프레임’으로만 보는 게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정일 변호사는 “정부는 책임을 부정하고 수사기관은 어느 선까지만 수사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공정하고 독립된 조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혜리·전지현·김송이·김나연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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