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관리 매뉴얼은 진화해 왔다…‘적용’의 적극적 판단이 부족했을 뿐[왜 또 참사인가]
각종 축제로 관리 대상 확대
매뉴얼·주최 문제가 아니라
정부 책무 방기가 진짜 문제
“주최가 없는 다중 인파사건 대응 매뉴얼은 없는 것으로 안다”(10월31일 홍기현 경찰청 경비국장), “주최 측 없어 축제가 아닌 현상, 구청은 할 수 있는 역할 다했다”(10월31일 박희영 용산4구청장), “주최 측이 없으면 경찰은 통제권을 가질 수 없다”(11월1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최자 없는 행사는 관리할 법적 의무가 없고 매뉴얼도 없다.’ 이태원 참사 직후 정부와 경찰이 내놓은 발언은 이렇게 요약된다. 일사불란하게 근본 원인을 제도적 한계에서 찾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주최자 없는 행사의 안전 방안을 마련하라”고 응답했다. 국회는 여야 없이 개정안을 쏟아냈고, 행안부는 지난 3일 ‘다중밀집 인파사고 안전관리 지침’을 만들겠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이태원에서 압사 참사가 벌어진 지 5일 만이었다. 정말 매뉴얼이 문제였을까. 지침이 만들어지면 시민들은 압사 위험에서 안전해질 수 있나.
매뉴얼과 주최자 유무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방기한 관계 당국이 매뉴얼을 탓하며 책임을 미루기 바쁘다고 지적했다. 핼러윈을 앞둔 상황에 적용할 만한 매뉴얼은 이미 갖춰져 있었다. 애초에 ‘압사 사고’를 계기로 탄생한 매뉴얼은 ‘참사’로 불리는 사건을 겪을 때마다 개정되고, 추가되고, 보완됐다.
압사 사고와 관련된 안전 매뉴얼은 17년 전 처음 만들어졌다. 2005년 10월 경북 상주시민운동장에서 열린 공연에 입장하던 시민 11명이 압사하자 압사 사고 대책의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경찰청은 그해 ‘수익성 행사 관리 매뉴얼’을, 소방방재청은 이듬해 ‘공연·행사장 안전 매뉴얼’을 각각 만들었다.
경찰청은 당시 민간 행사도 안전관리 필요성이 제기되자 ‘혼잡 경비’에 적극 대처하겠다며 매뉴얼을 펴냈다. 이 매뉴얼은 2006년 ‘혼잡 경비 실무 매뉴얼’로 개정됐다. 민간이 주최하는 행사뿐 아니라 군중이 모이는 각종 축제로도 안전관리 대상을 확대했다. 2014년엔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로 재차 개정됐다. 이 매뉴얼 마련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관리 분야를 위한 65번째 국정과제로 선정된 터였다.
경찰청의 2014년 버전 매뉴얼을 보면 ‘다중운집’ 개념을 “조직되지 않은 다수 군중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축제, 공연, 체육경기, 행사 등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정부·민간, 옥내·옥외, 국내·국제, 수익성·공익성 여부를 불문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누가, 어디서 열었는가와 상관없이 다중운집 행사의 안전관리를 해야 한다는 취지다.
구체적인 현장 관리 방안도 담겼다. 거대 인파가 모이거나 극단적으로 혼잡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지하철 입구 등 취약시설에 경력을 배치하고, 인파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시설물로 안전공간·통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참사가 벌어진 당시 이태원 상황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매뉴얼이지만, ‘주최가 있는 행사’를 전제로 한 매뉴얼이라 적용할 수 없다는 게 경찰 입장이다.
그러나 경찰청 매뉴얼 내용과 유사한 지침이 현장에서 작동된 때도 있었다. 용산경찰서는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다중 인파 안전사고 대책을 포함한 ‘핼러윈 치안대책’을 세웠다. 특히 2020년 대책에선 안전사고 예방 및 조치사항에 ‘압사’를 직접 언급하며 주요 골목 10곳에 경찰기동대 60명을 배치하고 폴리스라인을 설치해 현장 질서를 유지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이 같은 지침은 올해 들어 마련한 안전사고 대책에선 빠졌다.
소방방재청의 매뉴얼도 예상치 못한 참사들을 겪고 몇차례 개정을 거쳐 ‘2021년 지역축제장 안전관리 매뉴얼’로 보완됐다. 그사이 공연·행사장에서 지역축제로까지 적용 대상이 늘었다. 안전관리계획 수립 의무 역시 ‘지자체장’에서 ‘민간’ 개최 축제까지 확대됐다. 하지만 이태원 핼러윈 행사의 경우 특정한 주최가 없어 매뉴얼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게 서울시와 용산구청 입장이다. 매뉴얼의 토대가 된 재난안전법 조항이 지역축제 개최 시 안전계획수립 주체가 없을 때 책임자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편다.
하지만 매뉴얼은 ‘모든 축제에 대해 안전관리계획 수립’을 권고사항으로 명시하고 있다. “시장, 군수, 구청장은 지역축제의 특성·위험·규모 등을 고려해 본 매뉴얼 적용 여부를 판단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지자체와 경찰 모두 적극적으로 판단하면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이 있었음에도 이번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권설아 충북대 국가위기관리연구소 재난안전혁신센터장은 “이런 매뉴얼은 지자체별로 지역 특성에 맞춰 수정·적용하도록 돼 있다”며 “1차 재난관리 책임기관인 구청에서 용산구만의 매뉴얼을 갖고 있어야 마땅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법적 근거만 따지며 안이하게 대응한 것이 근본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재난안전법 4조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경찰 등 국가기관이 재난이나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명시한다. 헌법 34조 6항은 ‘국가가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권설아 센터장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가 1차 목적이어야 할 국가가 (주최 측이 없어 대응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미 매뉴얼 자체는 충분하다는 지적도 있다. 재난별 매뉴얼이 마련돼 있으며 고치거나 더하는 일보다는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방안부터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정지범 울산과학기술원 교수는 “‘매뉴얼이 없다’고 하는 게 가장 쉬운 답이지만 오히려 온갖 재난별로 매뉴얼이 너무 많아서 무용지물이 되곤 하는 게 문제”라며 “어떻게 해야 현장의 실무자들이 매뉴얼을 쉽게 숙지하고, 간단한 형태로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김희진·김송이·전지현·김나연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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