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국제 교역량… ‘수출 중심’ 한국엔 악재
최근 글로벌 교역이 둔화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소비 위축과 인플레이션 같은 일시적 원인도 있지만, 탈(脫)세계화와 경제 블록화 같은 구조적인 요인도 적잖게 작용하고 있다. 교역 부진이 심화할 경우 한국을 비롯해 자유무역 체제로 수혜를 입었던 수출 중심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공급망 대란 풀렸는데 교역은 정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급감한 글로벌 교역은 지난해 이후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다. 네덜란드 경제정책분석국(CPB)에 따르면, 글로벌 교역량은 지난해 4월과 5월 전년 동기 대비 24.6%, 23.5% 증가했고 6~10월에도 월 평균 8.8% 늘었다. 올 초까지만 해도 비교적 순조로운 흐름을 보였던 국제 무역에 본격적으로 이상 신호가 나타난 건 3월 교역량 증가율이 1%대로 뚝 떨어지면서부터다. 처음엔 기저효과와 공급망 대란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극심한 공급망 대란이 상당 부분 해소됐는데도 교역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뉴욕 연준에서 발표하는 글로벌 공급망 차질 지수는 지난해 12월 4.30까지 올랐다가 지난 9월 1.05까지 떨어졌지만, 교역량 증가율은 4~5%대에 머물고 있다.
글로벌 교역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주요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가장 먼저 소비 둔화를 꼽는다.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이후 과열됐던 보복 소비가 정상화된 데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으로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선진국, 신흥국 가릴 것 없이 올해 3~4월을 기점으로 소비가 둔화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선진국에서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핵심 상품 소비는 코로나 이전인 2018~2019년 추세와 비교해 올해 3월 6.6% 증가한 이후 점차 하락해 8월에는 5.2% 증가에 그쳤다. 신흥국도 지난 4월 정점(9.4% 증가)을 찍은 뒤 8월에는 8.8%로 낮아졌다.
◇경기 위축에 신냉전까지
경기 위축으로 인한 교역 둔화는 갈수록 뚜렷해질 가능성이 높다. 전 세계 주요 제조 업체들의 구매 담당자를 대상으로 신규 주문과 생산량 변동 여부 등을 조사해 수치화한 지표(글로벌 제조업 PMI)는 이미 뚜렷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제조업체들의 생산 활동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주문량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글로벌 제조업 PMI 수치는 보통 2~3개월 시차를 두고 무역 통계에 반영되는 경향이 있다. 글로벌 제조업 PMI는 지난해 말 54를 넘었다가 이후 꾸준히 하락해 지난 9~10월에는 50 아래로 떨어졌다. PMI는 50 이상이면 경기 확장을, 50 미만이면 경기 위축을 의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기선행지수(CLI) 역시 최근 꾸준한 하락세다. 회원국의 소매판매, 산업생산, 고용지표 등 광범위한 경제 영역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6~9개월 뒤의 경기 상황을 예측하는 OECD 경기선행지수는 올해 초까지 100을 넘었다가 지난 9월 98.6까지 떨어졌다. 이 지표는 100을 기준으로 수치가 낮을수록 경기 전망이 좋지 않음을 의미한다. 삼성증권 정성태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현재 글로벌 교역 둔화 국면은 IT 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가 급작스럽게 감소했다는 점에서 2001년 IT 버블 붕괴 당시와 비슷하다”며 “내년 글로벌 교역 규모는 올해보다 2%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사태와 미·중 갈등으로 경제 블록화와 탈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교역 환경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 러시아는 수출입 상위 10국 중 6~7국이 서방일 만큼 자유주의 진영과의 무역이 활발했지만, 전쟁 후 각종 제재로 서방과의 교역이 사실상 끊겼다. 중국도 서방과의 교역은 줄고 러시아와는 경제적으로 더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지난 9월 중국의 대미(對美) 수출은 위안화 기준으로 전년 대비 11.6% 감소했고, 독일·프랑스로의 수출도 각각 5.6%, 7.6% 줄었다. 미국은 중국의 최대 수출국이고,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EU) 내 중국의 최대 교역국이다. 캐나다로의 수출은 무려 22.2% 줄었다. 반면 9월 중국의 대러시아 수출은 21.2% 늘어 3개월 연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지정학적 갈등과 안보 이슈가 무역·금융·기술 전쟁에 기름을 부으면서 탈세계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며 “보호주의의 귀환과 미·중 갈등이 세계 경제와 공급망을 더욱 분열시킬 것”이라고 했다.
◇수출 중심국에 타격... 달러 강세 길어지나
글로벌 교역 둔화는 한국 같은 수출 중심 국가에 대형 악재다. 지난달 우리나라의 수출은 전년 대비 5.7% 감소했는데, 수출이 감소한 것은 2020년 10월 이후 2년 만에 처음이다. 무역 수지도 7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대만 등 제조업 비중이 높은 아시아권 국가도 수출 실적이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다. 지난 5~7월 17~18%대 수출 증가율을 기록했던 중국은 9월 수출 증가율이 5.7%까지 주저앉았고, 대만은 같은 달 -5.3%를 기록했다. 블룸버그는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금리가 미국·유럽의 소비 지출을 압박하면서 글로벌 교역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아시아의 공장들도 가동률이 크게 떨어진 상태”라고 전했다. S&P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의 슈리야 파텔 이코노미스트는 “팬데믹 초기인 2020년 5월 이후 전 세계 신규 주문이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반면 서비스업 비중이 높고, 자국 내 소비 지출이 GDP(국내총생산)의 70%를 차지하는 미국은 글로벌 교역 둔화에도 비교적 타격이 적다. 이에 따라 한국·중국·대만 같은 제조업 중심 수출 주도형 국가와 미국 간 경기 온도 차가 극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다른 국가에 비해 양호한 경기 상황을 믿고 미국이 기준금리를 계속 올릴 경우 강달러와 그로 인한 주변국들의 피해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연세대 경제학부 성태윤 교수는 “한국 경제는 주력 산업인 반도체를 비롯한 수출 타격으로 큰 위험에 빠진 상태”라며 “미국과의 금리 차, 인플레이션 등으로 금리도 내릴 수 없는 처지여서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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