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주년 창간기획] '빛'으로 상처받은 영혼 치유…그 길이 곧 해방
"빛으로 찾는 구원"… 해방은 곧 자유를 찾는 길
대전을 인생의 종착지…대전시청사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프로젝트 추진
"모든 것은 해방을 위한 일입니다. 결국 도달하게 될 길은 영혼의 치유겠죠. 대전시를 인생의 종착지로 삼고 모든 이들에게 빛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지난 달 17일 오후 '빛의 화가'를 만나기 위해 유성구 카이스트(KAIST) 학술문화관 1층 작업실을 찾았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그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익히 들어온 명성 탓일까. 스테인드글라스 예술 분야의 세계적 거장 김인중(82) 신부(베드로·프랑스 도미니코수도회)에게선 가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지난 8월,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에 2년간 초빙석학교수로 임명됐다. 최근 김 신부는 카이스트 중앙도서관인 학술문화관 천장을 53개 조각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하는 작품을 진행 중이다.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응시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언뜻 보면 무악(巫樂) 장단에 맞춰 살풀이춤을 추는 듯하고, 색색의 무대 휘장이 눈앞에 휘날리는 것 같기도 했다.
김 신부의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 작품이 말을 걸어오기까지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빛'을 가만히 떠올려봤다. 일순 경이로워졌다. 무형의 그것을 유형의 세계로 끌어내릴 수 있단 말인가. '빛의 화가'라는 칭송이 아깝지 않은 이유다.
문득 김 신부가 공학계열이 강세를 보이는 곳에 교수로 임명된 까닭이 궁금해졌다. 아마 많은 이들이 놀랐을 것이다. 예술과 과학 사이 도대체 어떤 접점이 있었던 걸까.
"카이스트가 공학도 중심 교육기관이라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창의력이나 상상력은 뜻밖에도 다른 영역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한군데 매몰해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죠."
김 신부는 신흥초를 졸업한 뒤 대전중, 대전고를 거친 그 시대의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다름 아닌 서울대 미대에 진학하기로 했을 때 부모님의 격한 반대에 부딪히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많으셨죠. 그런데 말이죠,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동극장이 있을 당시 어머님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요. '극장 간판 그리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번다더라'. 하하.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안심하셨습니다."
예술가의 길을 걷던 그는 성소(聖召, 사제의 길)를 받게 된다. 누군가는 '돌연'이라고 표현하겠지만 어쩌면 그에겐 당연한 수순과도 같았다. 김인중 신부는 1974년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사제서품을 받는다.
"소신학교에서 장래에 신부가 되겠다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미술 선생으로 근무하다가 프랑스로 유학의 길을 떠나기 직전이었죠. 학생들에게 헤어질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도 여러분과 같은 길을 걸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 결심이 섰던 거죠."
예술가이자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김인중 신부. 그렇지만 그는 두 길을 분리해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다. 교차점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두 갈래의 길은 결국 하나의 길이었던 셈이다.
"왜 도미니크 수도회를 택하게 됐냐고 묻는다면, 예술가의 성소를 받아들이는 수도원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르네상스 시대 '수태고지'란 그림을 그렸던 작가 프라 안젤리코도 도미니크 수도회 신부님 출신이시고.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두개의 길이겠지만 결국은 예술가의 길이든, 성직자의 길이든 곧 하나입니다. 우리가 괜히 갈래의 길로 나눠보려는 것 아닐까요?"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의 작품에는 왜 제목이 없을까. 김인중 신부에겐 늘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었다. 6.25 전쟁은 그의 말마따나 아직도 아픈 기억이다. 화폭 앞에 섰을 때면 늘 돌아오는 추억 중 힘겨운 조각이 바로 그것이다.
"해방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이. 종교적인 차원에선 어떤 구원이랄까.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림에 제목을 주는 순간 우리의 상상력을 억압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해방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김인중 신부는 최근 충남 청양에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빛섬 아트갤러리'를 개관했다. 지역 발전 상생 프로젝트 1호점이다. 그는 프랑스 중남부 작은 도시인 브리우드에 위치한 11세기 로마네스크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 37점을 들이면서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3개를 달성한 적도 있다.
"시골에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냐 하는데, 명성을 얻을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건 의미가 없어요. 화업이 세상에 어떻게 빛을 나눠줄 수 있는 행위로 귀결될 수 있는지 최고의 관심입니다. 그게 바로 '빛섬'입니다."
요즘 김 신부가 몰입해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 대전시청사 2층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에겐 대전을 한국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예술 도시로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 가면 시청사에 뭉크 화가가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오슬로를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이 제일 먼저 찾는 곳이죠. 우리 대전이라고 그럴 수가 없을까요?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건, 제가 성직자가 맞지만, 또한 예술가라는 점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전혀 '스토리'가 없습니다. 오직 빛과 세계, 판타지가 있을 뿐이죠."
대전은 그의 종착지다. 김인중 신부는 충남 부여 출신으로, 늘 의식 한가운데 백마강이 흐르고 있다. 출생지 이상의 의미로, 문화·역사적 뿌리가 깊게 박혀있다.
"한화 이글스 팬입니다. 맨날 깨지니까 '야, 내가 마운드에 올라가야겠다'라는 생각도 들고. 하하. 예술 쪽과 연관해 말하자면, 지난번 부여에 갔을 때 기어이 60년 만에 백마강을 보러 갔다니까요. 백마강이 제 의식 속에 흐른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노(老)화가는 80여 년을 해방으로부터 걸어왔다. 그가 걸어온 길은 과연 어디로 이어질지 넌지시 물어봤다.
"치유라고 할 수 있죠. 언젠가 러시아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14살 소녀가 고백을 하더군요. 구석에서 한 시간 동안 펑펑 울었다고. 해방에서 시작한 작품이 누군가의 영혼을 치유하는 셈이죠. 앞으로도 세상에 빛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내놓으렵니다."
해방으로 시작해 치유로 꽃을 피운 김인중 신부. 그는 오늘도 묵묵히 '빛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취재1팀 우세영 부장, 정리=취재1팀 김동희 기자
◇김 신부는…
'빛의 화가'.
김인중(82) 신부(베드로·프랑스 도미니코수도회)의 애칭이다.
김 신부는 국제적 명성을 얻은 화가로,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의 거장으로 불린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김 신부는 스위스 프리부르대와 파리 가톨릭대에서 수학했다.
그는 서울대 재학 시설 신앙을 교수하는 '소신학교(고등교육기관인 '대신학교' 진학을 위한 일종의 중등학교)'에서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미술을 교육하다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그 후 1974년 프랑스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하며 사제와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제이자 예술가였던 그가 열었던 전시회는 무려 200여 회.
그의 작품은 스테인드글라스 종주국인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이탈리아·스위스 등지에 있는 세계 유수의 성당 40여 곳에 설치됐다.
심지어 1789년 프랑스혁명 후 전시회 공간 등을 일절 내주지 않던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200여 년만인 2003년, 그의 작품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착좌(着座) 25주년 기념전을 열기도 했다.
김 신부는 그만의 화려한 색채와 동양의 여백을 접목한 예술성과 공로를 인정받았다. 2010년엔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훈장인 '오피셰'를 받았고, 2016년엔 한국인으로서 사상 첫 '아카데미 프랑스 가톨릭' 회원에 추대됐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앙베르와 호주 애들레이드엔 '김인중 미술관'이 건립되기도 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인 드니 쿠타뉴(Denis Coutagne)는 저서 '김인중-획을 긋다'에서 이런 김 신부에 대해 "회화로는 인상파 화가 폴 세잔, 스테인드글라스에선 야수파 앙리 마티스, 도자로는 입체파 파블로 피카소를 계승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김 신부가 최근 세계적인 명성을 뒤로하고 대전을 찾았다. 충청지역을 인생의 종착지로 삼은 것이다. 80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늘 백마강이 의식의 한 편 속에 흐르던 그였다.
김 신부는 지난달 충청권에서도 가장 열악한 청양군 정산면에 '빛섬 아트갤러리'를 개관했다. 문화 소외 지역에 빛을 선사하는 건 그의 오래된 꿈이다. '빛섬'은 '빛을 바라는 섬', '빛을 나눈 섬', '빛을 섬기는 섬' 등 다중의 뜻을 지녔다.
그렇게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김 신부. 그는 오늘도 지역 사회와의 따뜻한 동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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