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후핵연료 해법,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실패”
‘탄소중립 위한 사용후핵연료 해법’ 토론회
원전 가동 43년째 처리장 마련 못해
한국이 40여년 동안 사용후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해법 마련에 실패한 것은 주민·환경단체·원전업계·정부 등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협력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데도 소통과 신뢰 부족으로 인해 협력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며, 건강한 공론장 형성을 통한 신뢰회복이 해법 마련의 관건이라는 의견이 제시됐다. 또 정부 주도 공론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과 공론화의 관할권을 산업부에서 총리실 산하 독립적 행정위원회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위원회(가칭)로 이전하자는 데 이해당사자들이 공감대를 이뤘다. 사용후핵연료 거버넌스 개편과 함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 관련 로드맵을 명확히 해서 주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데도 다수가 동의했다.
사용후핵연료는 원전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로 방사능 농도와 열 발생률이 높은 위험 물질이다. 1978년 고리 1호기가 첫 상업운전을 시작한 이후 43년 동안 처분장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시민사회와 지역주민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합의에 실패했다.10일 제13회 한겨레 아시아미래포럼의 제4세션 행사로서 서울 대한상의에서 열린 ‘탄소중립을 위한 사용후핵연료 해법’ 토론회에서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실장은 주제발제를 통해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특히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건설 문제는 필요성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친핵-탈핵, 친원전-반원전의 대립구도 속에서 양 진영의 대립적 포로로 전락했다”며 ‘죄수의 딜레마’ 문제를 제기했다. ‘탈원전 탈레반’ 진영은 방폐장 건설이 원전의 지속과 확대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며 의도적인 지연을 통해 원전 가동률을 낮추겠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반대로 ‘원전 마피아’ 진영은 이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공론화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기술중심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 실장은 “정부의 공직자도 ‘내 임기 중에는 (정책을) 결정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님투’(Not In My Terms Of Office)의 무사안일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면서 “이해당사자들이 진정으로 사용후핵연료 해법 마련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원하느냐”고 질문했다.
은 실장은 또 “이해관계자들이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절차와 방법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문재인 정부 때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 재검토위원회가 지역주민과 탈핵 시민단체의 직접 참여를 배제해 ‘반쪽짜리 공론화’로 전락한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되며, 직접 참가를 원하는 탈핵 시민단체 및 지역사회의 정서와 요구를 반영한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은 실장은 “사용후핵연료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선결조건으로 “기존 원자력안전위원회와 원자력진흥위원회와 별개로 총리실 산하 독립적 행정위원회인 ‘고준위방사성폐기물위원회’를 새로 만들어서 산업부가 맡고 있는 관리정책과 의견수렴절차(공론화)를 전담토록 하자“며 거버넌스 개편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또 “허술한 사용후핵연료 관련 법령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사용후핵연료 거버넌스 개편,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 및 건설 시한 규정을 포함한 로드맵, 유치지역 지원 방안 등을 담은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면서 “2024년 총선 일정을 고려하면 2023년 상반기 중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는 여야 의원들과 정부가 각각 마련한 4개의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안이 발의돼 있다. 은 실장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련 정책을 둘러싼 소통 제고와 신뢰 증진을 위해 지역주민·탈핵 환경단체·산업계 등 이해관계자 집단과 일반 시민의 절반씩 참여하는 ‘에너지 시민의회’ 구성해서 국가 에너지 정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로 삼자”고 제안했다.
김학린 단국대 교수가 사회를 본 종합토론에서 정정화 강원대 교수(전 사용후핵연료 재검토위원장)는 “윤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의 핵심은 원전 부지에 임시저장시설을 확충해 지속가능한 원전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라면서 “영구처분장 확보를 위한 부지선정 절차에 착수할 경우 자칫 원전 확대정책이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사회적 합의형성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부가 탈핵단체와는 더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탈핵단체가 공론장으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 주어야 한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에너지 시민의회’를 구성하는 것은 바람직한 대안으로 판단되지만, 탈원전 폐기를 제1공약으로 내건 윤석열 정부가 원전정책을 시민의회 의제로 제시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강원 사회갈등해소센터 소장은 신뢰와 합의를 통해 사용후핵연료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3단계 시나리오를 제안했다. 이 소장은 “1단계로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 증설 시도 중단 등을 포함해서 신뢰회복을 위한 정부와 이해당사자가 간 신사협정 체결, 2단계로 친원전과 탈핵 단체 간 대화 포럼 등 상호이해와 신뢰형성을 위한 다층적인 대화절차 진행, 3단계로 사용후핵연료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세스에 관한 사전 룰 세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홍 전 경주시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사용후핵연료 해법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원자력 진흥의 관점은 신뢰회복과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면서 탈핵 로드맵을 먼저 제시하고, 원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 건설이 무산되면 다른 해결책이 마련될 때까지 원전 가동을 중단할 것을 공론화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반면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추진단장은 “고준위 관리정책과 원전정책을 함께 논의하면 갈등만 야기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분리해야 한다”고 이견을 보였다.
또 정정화 교수는 “문재인 정부 때 재검토위원회의 지역공론화가 실패한 일차적인 책임은 공론화를 통한 합의가 목적이 아니라, 월성원전에 임시저장시설(맥스터)을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론화를 악용한 산업부에 있다”면서 “국무총리 소속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은 두차례의 공론화 논의 결과이고 정부·국회·환경단체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안재훈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국장은 “순전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고준위 방폐장 부지선정에 성공했다는 해외 사례는 환상이고, 우리 사회 역시 합의형성이 쉬운 일이 아니다”면서 “절차적 민주성 확보, 모든 자료와 정보의 공개, 관리정책의 독립적 위원회로 이관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종순 조선대 교수는 “산업부가 주도한 2차에 걸친 공론화위원회가 국민 수용성 확보에서 큰 진전 없이 종료된 만큼 국회 주도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면서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하므로 복잡한 사안을 처리하는데 효과적이고, 민주적이라는 명분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정민 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은 “원전에 대한 찬반 입장을 떠나 사용후핵연료의 안전 저장 및 처분 관련 쟁점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 안전하고 경제적인 방법은 원자로에서 방출된 사용후핵연료는 5 년간 수조에서 습식저장하고, 30~50년간 건식저장시설에서 저장한 이후에 전용 처분용기 속에 넣어서 공학적으로 잘 설계된 깊은 지하 처분장에 묻는 것 ” 이라고 말했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 24 기에서는 매년 750 톤 정도의 사용후핵연료가 계속 쌓이고 있는데 , 원전 내 습식저장조와 건식 건식저장시설에 보관 중이다 . 반면 이상홍 전 정책위원장은 ”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은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고 , 100 년 이상 장기 중간저장도 방안이 될 수 있다“면서 ”심지층 처분장 건설만을 위한 특별법 논의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재택 산업통상자원부 원전환경과 사무관은 “특별법을 제정해서 부지선정 절차와 지역 지원에 대한 국민신뢰를 확보하고 주민투표 등 주민참여 절차와 신뢰받는 전담조직을 마련하겠다”면서 “고리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 건설 문제도 특별법에서 정한 절차를 따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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