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수록 서로에 상처… ‘고슴도치’ 모녀의 민낯

권이선 2022. 11. 1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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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속옷 조차 독립 못한 엄마와 딸
함께 하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폭력·원망으로 점철된 삶 고찰
화합 아닌 홀로서기 결말 ‘신선’
신예배우 임지호 등 흡입력 압권
이정(임지호 분)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속옷 더미를 빨래한다. 누군가와 떠들썩하게 통화하며 화장실로 들어선 엄마 수경(양말복)은 이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옆에서 볼일을 본다. 아예 팬티까지 벗어 이정에게 휙 던진다. 딸은 매섭게 엄마를 노려보지만 이내 빨고 있던 팬티를 꾹 짜 건넨다. 수다스러운 수경의 통화소리마저 사라진 공간에는 적막만이 흐른다.
10일 개봉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마땅히’ 받아야 할 마음을 기대했던 엄마와 딸의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한 영화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5관왕 등 국내 주요 영화제 9관왕을 차지한 작품이다. 찬란 제공
세면대 속 뒤섞인 속옷들은 모녀의 얽혀버린 관계다.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나누면서도 둘 사이는 폭력과 원망으로 점철돼있다. 속옷조차 독립하지 못한 두 여자는 온전히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함께 하지도 떠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살아간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사회로부터 암묵적으로 강요돼 온 모성 신화를 과감히 걷어내 동일성과 책임감, 죄책감, 의존 등 복잡하게 얽혀있는 모녀 사이를 관찰한다. 작품을 연출한 김세인 감독은 “가장 모순을 품고 있는 관계의 끝단은 가족이고, 특히 모녀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회가 ‘모녀’와 ‘모성’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 속에 여성들을 가뒀다”고 말했다.

첫 장면부터 팽팽했던 긴장감은 금세 폭발하고 만다. 지독한 다툼 끝에 차에서 내려 혼자 걸어가던 이정을 수경의 차가 들이받은 것. 곪아있던 두 사람의 상처는 터져버리고 만다. 수경은 차량의 급발진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이정이 사고의 고의성을 주장하며 법적 공방까지 불거진다. 관객들은 큰 충격파를 전달받지만, 감독은 이 사건을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다룬다. 대신 두 사람의 해묵은 감정과 관계를 다루는 데 집중한다.

“네 팔뚝, 허벅지살 다 네 건 줄 알지?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고 욕먹는 건 입에 쓰다고 뱉어? 너 진짜 의리 없어.” “나도 엄마도 이렇게 사는 거, 다 엄마 때문이잖아.” 두 사람 사이 거듭되는 비난과 원망, 그 밑바닥에는 자기혐오가 짙게 드리워있다. 긴 세월 삶의 공해가 독소처럼 쌓인 엄마는 딸에게 이를 쏟아내고, 감정의 찌꺼기를 뒤집어쓴 딸은 텅 빈 마음에 분노를 채워 넣는다. 감독은 통념적 모녀가 아닌 이들을 옳고 그름의 판단 단두대에 세우는 대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두 시간 넘게 이어지는 모녀의 교전을 보는 것만으로 상당한 감정적 소모를 겪게 된다. 모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기를 절실히 바라게 되지만 삶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영화는 극적 화합이라는 판타지적 결말 대신 감정을 적나라하게 터뜨리고, 홀로서기를 시작하려는 인물들 모습으로 끝을 낸다. 관계의 민낯을 마주한 뒤에야 비로소 온전한 관계, 온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결말이다. “곱고 맑고 낭만적으로 살고 싶다”는 수경은 리코더를 불고, 자신의 신체 사이즈조차 모르던 이정은 속옷을 구매한다.
김 감독은 엄마와 딸은 개별적 역사를 가진 개별적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한 모녀를 봉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 여자가 독립하는 영화이길 바랐다”며 “작업 초기, 수경이 이정을 피해 도망가는 엔딩을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수경은 도망쳐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두 여자가 의존하던 서로에게 벗어나, 각자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감독은 이처럼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모녀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 자체에 대한 집요한 고찰을 담아내면서 작품에 보편성을 더했다. 예리한 시선은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도 인정받았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김 감독의 장편 데뷔작임에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호평받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우디네극동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도 초청돼 해외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극을 이끌어나가는 배우들의 흡입력도 대단하다.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은 신예 임지호는 심사를 맡은 엄정화 배우로부터 “천천히 움직이며 켜켜이 쌓아가는 감정선은 관객들을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는 호평을 받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남선우 프로그래머는 양말복에 대해 “‘어머니라는 존재는 결국 엄마 놀이를 하는 딸일 뿐’이라는 엘레나 페란테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배우”라고 평했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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