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자본이 불평등 등 사회경제적 위기 풀어갈 열쇠”
로버트 퍼트넘 미 하버드대 교수
노리나 허츠 영 UCL 명예교수
“미국의 19세기 말에도 극심한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 지독한 분열, 비관적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지만 결국 파국을 피하고 상승의 시기로 역전했다. 도덕·문화적 변화가 이끌었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아니라 청년, 시민들의 참여 때문에 가능했다.”
10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아시아미래포럼의 ‘디지털 시대, 새로운 신뢰는 가능한가’ 주제 세션에서 첫번째 기조연사로 나선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교수는 “긴 역사적 흐름으로 보면 지금은 절망적 시기로 보이지만 업스윙(상승·호전) 할 수 있다”며, 그 해법으로 도덕적 책임과 공동체성 회복을 거듭 강조했다. 퍼트넘은 신뢰, 사회적 유대 등과 같은 ‘사회적 자본’ 개념을 통해 현대 미국 사회의 위기를 분석한 세계적 석학이다.
퍼트넘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최고의 상승기를 구가하던 미국의 1960년대에 주목하면서 “시민들이 지역사회의 일상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정체성·호혜성의 공감대가 매우 높았던 시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이 느끼는 삶의 주관적 만족도는 하락하고 청소년 자살률은 상승하는 등 도처에서 부정적 지표들이 터져 나왔다. 그는 1890년 이후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와 지표를 제시한다. 소득 분배율, 법인세율, 실질 최저임금 등 거시적 데이터 외에도 언론에 보도된 양당 간 협치와 갈등, 클럽 모임 참석 수, 교회 참석 수, ‘적자생존’ 어휘의 빈출도, 신생아 작명 통계 등을 통해 미국의 상승과 하락의 추이, 원인을 살펴보고 변화의 가능성을 찾았다. “지금과 같은 미국의 쇠퇴는 시민 상호 간 도덕적 책임의 부재, 헐거워진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이 하락했기 때문”이라는 게 퍼트넘이 내린 진단이다. 그는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나’와 공동체성을 상징하는 ‘우리’라는 지표로 미국 사회를 보면 공교롭게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위기와 겹친다”고 짚었다.
퍼트넘 “시민들 헐거워진 신뢰가 미국 쇠퇴 불러”
퍼트넘은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 등 사회경제적 위기를 풀어갈 열쇠도 도덕적 책임 등 사회적 자본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경제적 변화, 제도의 변화가 선행하고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뒤따른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미국 100여년의 역사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살펴보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며 “도덕적 협력, 연대의 문화가 선행하고 뒤이어서 정치·경제의 변화가 나타났다”고 짚었다. 퍼트넘은 “미국의 125년 역사는 ‘나에서 우리로, 다시 우리에서 나로’ 변화해온 역사”라고 강조하면서 “거시적,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지금과 같은 최악의 시기야말로 곧 상승의 시기로 반전할 가능성이 높다. 청년들의 투표참여율 상승 등에서 업스윙의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좌장을 맡은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세계 각국을 비교 분석해 충분한 근거가 쌓인 근대화 이론에 따르면 경제성장이 먼저 나타나고 뒤이어 가치관도 탈물질주의적으로 변했다”며 “저성장의 덫에 갇힌 한국이 과연 업스윙을 이룰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이에 퍼트넘 교수는 “가치관의 변화는 경제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며 “청년들의 투표율이 높고, 사회적으로 더 연결되어 있으며, 덜 외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준비가 되었다”고 희망을 피력했다.
허츠 “디지털 환경, 사회적 신뢰 약화로 포퓰리즘 득세”
‘고립의 시대, 사회적 신뢰는 가능한가’ 주제로 두번째 기조강연을 한 노리나 허츠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세계번영연구소 명예교수는 “디지털 환경에서 외로움과 고립감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이는 각국에서 포퓰리즘의 득세로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허츠는 “미국의 트럼프, 프랑스의 르펜, 이탈리아의 살비니, 독일의 우익정당(독일을 위한 대안)에 투표한 사람들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었다”며 “고립감은 소속감과 공동체를 내세우는 정치인들에게 의지하도록 하는데 그들이 제공하는 공동체는 특권적이고 배타적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허츠는 초고속 통신망 사회에서 깊어지는 외로움에 주목한 저서 <고립의 시대>로 주목받았다. 그는 “우리가 디지털 기기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대면적 관계가 줄어들고 있으며 모르는 새 공동체와의 연결이 희생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접촉이 점점 사라지는 디지털 세상을 더 많이 접촉할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강조했다. 허츠는 사회경제적 지위나 연령, 성별에 관계없이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의 기반시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공공도서관, 공원, 청소년 동아리, 노인요양시설 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30살 미만의 한국인 66%가 어떠한 단체에도 속하거나 참여하지 않는 통계에 놀랐다”며 “사회적 신뢰를 재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현상”이라고 말했다.
토론에 나선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한국은 처음으로 이주하고 싶은 국가가 되었을 정도로 가시적 지표는 좋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위로부터 훼손되고 있으며 아래로부터 훼손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대안은 디지털 세계가 아닌 실질적인 연결성·소속감을 느낄 장소로서 시민사회에 있다”고 강조했다.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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