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칼럼] 참을 수 없는 전문가의 가벼움

한겨레 2022. 11. 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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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칼럼]올해 전문가 가벼움의 최우수는 단연코 학술 전문가다. 영부인 김 모의 국민대 박사 논문 검증 사례로 들춰진 오늘날 대학 전문가야말로 최고봉! 학부생의 기말 리포트도 안되는 걸 박사 논문이라 낸 것도 문제거니와 그 심사 과정도 수수께끼다. 나아가 ‘복사’ 수준인 박사 논문에 지도교수 서명날인까지 한 건 초등생도 웃을 일이다.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1984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다룬다. 옛 소련 체제의 감시와 통제 대신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던 1968년 ‘프라하의 봄’이 한 배경을 이룬다. 외과의사인 토마시의 가벼운 사랑과 사진작가 테레자의 묵직한 사랑이 대비된다. 또 영혼이 자유로운 화가 사비나의 가벼운 삶과 자상하고 진지한 학자 프란츠의 묵직한 삶도 대조된다.

2022년 대한민국 현실에서 왜 내겐 ‘참을 수 없는 전문가의 가벼움’이란 말이 떠오를까? 10월 말, 서울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모여든 젊은이 150여명이 어이없는 참사로 희생된 일은 너무나 무겁다. 반면, 시민안전을 책임지는, 판사 출신 주무 장관이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인 건 아니”며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던 건 아니”라 한 발언은 가로수 낙엽보다 가벼웠다.

따지고 보면, 이런 가벼움은 결코 처음이 아니다. 9월21일, 윤석열 대통령이 뉴욕에서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을 만난 직후 내뱉은 어휘가 “날리면”이냐 “바이든”이냐 하는 논란이 있었다. 평소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명쾌히 밝히듯 자신만만했던 모 대학 소리연구소는 엉뚱하게도 “판독 불가”라는 가벼운 결론을 내렸다. 또 35년 경력의 한 속기사는 그간 수사기관들과 많이 일해왔다면서도 당시 논란과 관련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으로 들린다”며 가뿐하게 정리했다.

대한민국 전문가의 가벼움은 법정에서도 쉬이 발견된다. 수십년 전 시국사범의 경우, 상당수는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자유권을 행사했음에도 판검사의 가벼움으로 인해 억울한 죽음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중 일부가 수십년 뒤 힘겨운 재심 과정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은들, 이미 대부분의 당사자는 가고 없다. 초등학생도 아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어떤가?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을 쥔) 만명에게만 평등하다”고 비판했던 고 노회찬 의원이 생각난다. 노동자, 농민, 서민들은 가벼운 죄를 지어도 큰 수모를 겪거나 수치심에 낯을 들기 어렵지만, 재벌과 권력자들은 중죄를 지어도 “조금 미안…”할 뿐, 먼지처럼 가볍게 털어 낸다.

잘 드러나진 않지만, 환경이나 에너지 전문가들은 어떤가? 이들에게 환경과 에너지는 경제성장과 돈벌이 도구일 뿐, 결코 생명의 근원과 지속가능성을 성찰할 계기가 아니다. 꼬박 3년째 지구 전반을 장악한 코로나 위기, 갈수록 심각한 기후위기 등에 관해서도 이들 전문가는 눈과 귀를 틀어막고 초미세먼지보다 가볍게 외면한다. 새만금 개발이나 발전소 건설 같은 대형 사업에 필수인 환경영향평가 역시 이들 전문가의 가벼움으로 인해 지극히 형식적인 요식행위에 그친다. 이들에게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 붕괴, 1986년 체르노빌 원전 붕괴,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붕괴 등은 ‘강 건너 불’처럼 가배얍다. 57조원 규모 폴란드 원전 수출 계획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에 밀려 공수표가 된 것은 그들 전문가에겐 엄청 아까울 터! 반면, 그들에게 밀양 송전탑 투쟁이나 성주 사드 투쟁, 지리산 산악열차 투쟁, 설악산 케이블카 투쟁, 제주 강정마을이나 용천동굴 투쟁 등은 모두 ‘돈벌이 사업에 귀찮은 장애물’ 정도로 가볍게 치부된다.

게다가 노동 전문가는 어떤가? 굳이 여기서 과거 ‘창조컨설팅’ 같은, 민주노조 박살 전문가 집단을 논하고 싶진 않다. 이들은 이미 유성기업, 상신브레이크, 발레오전장, 케이티(KT), 연세의료원, 문화방송 등에서 노동조합 깨기 전문가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 최근 노동 전문가들의 억지 해석으로 노동시간(주 40시간제)을 교묘히 연장하려는 발상은 어이없고 경박하다. 나아가 민법의 손해배상과 노동법의 책임 문제를 다루는 논리를 보라. 노동자의 쟁의행위 뒤에 전개되는 회사 쪽의 수십억~수백억원 손해배상소송이 핵심 문제다. 회사를 대변하는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파업 등 쟁의행위로 인한 손실을 민법상 천문학적 손배소로 배상받으려 한다. 돈도 돈이지만 노동통제의 새 기법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법의 기원이 곧 민법의 허점을 메우는 특별법임을 모른다. 노동법은 민법에 우선한다. 그들은 또 쟁의행위의 ‘불법성’만 부각한다. 그러나 왜 노동자가 불법을 감수한 행위를 하는지는 침묵한다. 대다수 쟁의행위는 노동조건에 관한 사쪽의 불통과 부당함에 기인한다. 이런 점을 간과한 채 자본의 눈으로 큰소리침으로써 노동 전문가들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만 스스로 폭로한다.

그러나 올해 전문가 가벼움의 최우수는 단연코 학술 전문가다. 영부인 김 모의 국민대 박사 논문 검증 사례로 들춰진 오늘날 대학 전문가야말로 최고봉! 학부생의 기말 리포트도 안되는 걸 박사 논문이라 낸 것도 문제거니와 그 심사 과정도 수수께끼다. 나아가 ‘복사’ 수준인 박사 논문에 지도교수 서명날인까지 한 건 초등생도 웃을 일이다. 게다가 이것이 온 사회의 이슈가 되자 다수의 교수를 포함한 자체 검증단이 ‘결론적으로 아무 문제 없음’으로 정리한 건 참 어처구니없다! 이 모든 사태는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논문을 쓰느라 땀 흘리는 수천, 수만의 연구자들을 가볍게 우롱했다.

일찍이 이반 일리치 선생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전문가 시대는 인간을 불구자로 만든다”고 일갈했다. 일리치는 상품, 화폐, 노동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결국은 “근대화한 궁핍”을 부르며, 마침내 전문가들에게 배타적인 권위와 권력을 준다고 했다. “전문가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을 고객으로 정의하는 권위이며, 그 고객에게 필요를 결정해주는 권위이고,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알려주는 처방을 하는 권위다.” 철학 없는 전문가 또는 ‘전문가 백치’에 의한 전문가 독재는 그렇게 완성된다.

참을 수 없는 전문가의 가벼움을 끝장내는 첫걸음은 민중이 자신 안에 있는 삶의 자율성(power in people)을 재발견해, ‘강자 동일시’를 그만두는 것이다. 자본이 아닌 사람의 기준, 기계가 아닌 생명의 기준으로 삶의 자율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이해득실(interest) 관점을 경계하면서 간디 선생이 말한 ‘마을 공화국’을 만들고 재미나게 살면 된다. 이것만이 전문가 독재가 초래하는 삶의 소외를 극복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삶은 결코 가볍지도, 마냥 무겁지도 않다. 다만, 내면의 정직한 느낌(feeling)을 속이지 않고, 책임성(responsibility) 있게 뚜벅뚜벅 걸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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