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물가상승대응, 50년 전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세계경기가 안좋은데도 물가가 오르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이에 대응한다며 연신 금리를 올리고, 빚을 떠안은 만국의 중산층은 그럴 때마다 두려움에 떤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이런 상황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이후 50여년만이다.
물론 그때와 견주기는 아직 이르다. 80년대 초까지 10년 넘게 지속된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이나 불황의 규모가 훨씬 더 컸다. 하지만 호황이 아닌데도 물가가 오른다는 점만큼은 그때와 지금이 마찬가지다. 이렇게 낯선 경제상황이 펼쳐지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정책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신자유주의 시대도 80년대 초에 이런 식으로 시작됐다. 한데 반세기 만에 다시 비슷한 상황이 닥쳤다.
스태그플레이션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당시 경제학계 다수는 이를 순전히 화폐적인 현상으로 봤다. 주요국 정부들이 확장재정정책을 남발한 탓에 화폐공급이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실제 이 진단에 따라 미 연준은 80년대 초 금리를 20%대까지 올렸고, 이로 인한 인위적인 불황이 결국 장기 인플레이션을 잠재웠다. 그러나 이로써 거시경제의 최종통제권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서 연준을 포함한 금융세력에게로 넘어갔다.
70년대 당시에도 이견이 적지 않았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이 과연 화폐적 현상이기만 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더 근본적인 요인은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서 쌓여온 사회세력 간 모순과 대립이었다. 역사상 완전고용에 가장 근접했던 이 무렵 자본주의 중심부에서는 노동과 자본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국 수준을 넘어 지구 차원에서는 석유 등 1차 산품을 수출하는 남반구 국가들이 북반구의 일방적 수탈에 반기를 들었다. 중심부 경제의 독점자본은 이 모든 긴장과 충돌을 가격에 전가했다. 공산품 가격의 지속적인 인상에는 노자 대립과 남북 대립이라는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스태그플레이션을 오로지 화폐적 현상으로 설명하는 경제이론은 이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더없이 훌륭한 무기가 됐다. 이는 초고금리를 통해 인위적 불황을 조성함으로써 노동자나 남반구 국가들을 길들이는 데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직면한 근본 문제에서 사람들의 눈을 돌리도록 하는 역할도 했다. 덕분에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소되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더욱 거대하고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복합위기, 즉 불평등과 감염병, 기후재앙의 동시 전개다.
이번에도 물가상승을 둘러싼 담론 지형은 현 상황을 화폐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지배되고 있다. 미 연준이 이런 시각에 따라 금리를 인상하고 있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에 맞장구치며 재정정책마저 긴축 기조로 돌아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인플레이션의 진짜 동력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묵은 모순에서 나온다. 감염병에 대한 취약성, 과도한 화석에너지 의존, 강대국 사이 패권 충돌과 전쟁 같은 문제들 말이다.
70년대의 패착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거시경제 통제권이 금융세력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도록 놔둬서는 안된다. 물가상승을 금리인상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도 쟁점일뿐더러 백보 양보하더라도 재정정책마저 이 기조를 무작정 따라갈 이유는 없다. 공세적 확장재정을 자제해야 한다면, 증세를 통해서라도 생존권 위기와 기후급변에 맞서는 공적 개입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이를 통해 거시경제 통제권을 둘러싼 민주주의와 금융자본주의의 경계선도 새로 정해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최근 서울 이태원에서 있었던 비극적 사건에 제대로 답하는 과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제 안전 관련 예산은 시장지상주의가 강요하는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물며 보수정부의 긴축만능론이 통할 구석은 없다. 다름 아닌 여기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최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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