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이야기

한겨레 2022. 11. 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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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지난 1일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헌화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몇 년 전 귀향을 했다. 서울 인근에 살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인데 보통 이런 경우 귀향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겠지만 나로서는 태어난 동네 근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니, 게다가 내가 태어난 곳은 행정명칭은 “동”으로 끝나지만 별칭은 예나 지금이나 “촌”으로 끝나는 곳이고 이전 거주지는 신도시였으니 낙향까지는 아니더라도 귀향이라고는 잠시 우겨봄 직하다. 물론 잠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에서 태어났을 뿐 무슨 뿌리가 있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고 귀향의 계기 또한 수구초심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나서 스무해 넘게 살다 긴 세월 뒤에 돌아왔으니 아주 맨숭맨숭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산책 삼아 돌아다니며 나고 살던 곳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도 했다. 한군데도 정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언저리는 찾아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근방은 바탕이 산동네로 지금도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 실핏줄처럼 퍼져 있어 전체를 갈아엎지 않는 한 모자이크 조각의 윤곽들이 크게 바뀌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발로만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1959)을 원작으로 삼은 유현목의 영화 <오발탄>(1961)도 보았다. 월남한 가족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몸져누운 어머니가 느닷없이 “가자, 가자”를 외치는 것으로 유명한데 월남민이 모여 살던 이 동네가 그 무대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영화에 필시 내가 태어나던 무렵 동네 풍경이 포착돼 있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으로 주인공(김진규)의 집 근처가 나오는 흑백의 흐릿한 밤 장면들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만나는 어릴 적 친구들은 나만 빼고 모두 월남민 가족 출신이다.

월남민 외에 이 지역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옆의 거대한 외국군 기지였으며 이 지역 전체가 사실상 기지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기지는 무엇보다 이 지역의 경제중심이었다. 기지 내 소소한 일자리부터 영외 거주 군인의 거처, 군인의 영외 소비까지 모두 돈이었고, 이 돈을 좇아 월남민 아닌 이들도 모여들었다. 의미는 좀 다르지만 어쨌든 뿌리가 잘린 사람들끼리 얽히게 된 셈이다. 기지의 외국인 다수가 사실상 누구 못지않게 자기 뿌리에서 멀리 벗어나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뿌리에서 벗어난 세 집단이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어울렸던 셈이다.

살벌한 전쟁이 끝나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들이 함께 만들어낸 분위기, 이제 더 물러날 데가 없다는 악착같은 생존 의지와 이제 모든 것의 끝에 이르렀다는 체념이 맞물려 요동치는 분위기, 도시 한복판이면서도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이 디아스포라 특유의 분위기가 내 유년기와 성장기를 지배했고, 그래서 그 뿌리 없음의 분위기가 내 뿌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귀향해 보니 그런 분위기가 핵은 유지한 채로 다른 요소들을 흡수하며 변주를 거듭한 듯하다. 뿌리를 따지지 않는 분위기는 그 나름의 개방의 미덕을 발휘해 외국인, 소수 종교인 등 다양한 소수자가 이곳에서는 그나마 좀 편안해 보이는 느낌이다. 또 과거와는 달리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디아스포라를 원하는 사람들, 일시적으로라도 자기 뿌리와 환경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많은 사람이 스스로 찾아왔고 지금도 오는 것 같다.

따라서 아무리 나처럼 가만히 있어도 꼰대임이 드러나는 나이에 이른 사람이라 해도 가령 자생적인 핼러윈 행사 같은 게 있다면 그 무대로는 내 고향이 잘 어울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이곳이 세상의 끝이었음이 이렇게 참담한 방식으로 다시 드러날 줄은, 매일 아침 흰 국화로 덮인 내 고향 한곳을 지나며 쓰린 마음으로 애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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