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한전문가 존 메릴, “전술핵 재배치 한국 결정 사안 아냐···대북 특사 파견하라”
지난 9월,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핵 무력을 법제화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 지위는 불가역적이 됐다.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 후 워싱턴 외교가에는 미국의 비핵화 목표가 사실상 물거품이 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무성하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올해 들어 전술핵 훈련은 물론 단거리·중거리 탄도미사일까지 잇따라 시험 발사했다. 그러자 최근 한국 내에는 전술핵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표적 지한파 인사인 존 메릴 전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실장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전술핵 재배치는 북한의 선제공격을 불러올 수 있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 폐기는 한·미 동맹 약화는 물론 일본의 핵무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핵 문제의 해법과 관련해 “비핵화를 목표로 삼되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둔 군축회담이 가장 현실적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를 만나 전술핵 재배치 문제와 북핵 해법에 관해 들어보았다.
최근 북한이 단거리·중거리 탄도미사일 도발을 계속했다. 한국 내에는 전술핵을 도입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은데.
전술핵 재배치 문제가 마치 한국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인 것처럼 들리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미국이 크나큰 발언권을 갖게 될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주한 미군에 배치된 전술핵무기와 그에 따른 지휘 및 통제 문제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주한 미군이 보유하던 전술핵은 1991년 가을 조지 H. W.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모두 철수됐다. 또 그해 12월31일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만일 전술핵이 다시 도입된다면 북한의 강력한 반응을 촉발할 것이다. 북한이 선제공격으로 맞받아칠 수 있다. 북한이 러시아와 중국에 ‘북한에 핵무기를 배치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지속적으로 핵무기를 개발·실험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선언이 무슨 소용이 있나?
아마도 한국인들 대부분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능력에 대해선 더 이상 ‘사실상’이란 표현이 무의미하다. 오늘날 북한은 완전한 핵무기 국가다. 전문가들 대다수는 북한이 약 100개의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무용지물이 됐다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실수다. 오히려 어떤 형태로든 당시 공동선언문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최근 한국의 여당 대표(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는 북한이 7차 핵실험을 강행하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북한이 실제로 핵실험을 강행하고, 한국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공개적으로 폐기한다면 감정적으론 만족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나? 한국이 비핵화 선언을 폐기한 뒤 자체적으로 핵무기 계획을 가동할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황에서 폐기 선언은 나쁜 구상이라고 본다. 폐기 선언이 한·미 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후 한국이 얼마나 신속히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출 수 있을지, 중국과 일본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 한국 정부는 잘 판단해야 한다. 불행히도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빨리 ‘핵무장’을 할 수 있고, 핵폭탄 제조 원료도 확보하고 있다. 비핵화 선언 폐기로 일본의 핵무장을 재촉한다면 그게 똑똑한 짓일까?
한국도 당연히 핵무장에 버금가는 상응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은 핵문제의 ‘근본적 뿌리’를 미국의 줄기찬 대북 적대시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미국이 이걸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입장에서 보면, 핵무기는 상당한 군사적 균형자 구실을 한다. 북한의 군사 기술은 노후화돼 있어서 핵무기 없이는 훨씬 경제력이 크고 성장잠재력이 많은 한국과 지속적인 군사 경쟁을 할 수 없다. 북한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만일 한국이 북한처럼 핵무장으로 나아갈 경우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줄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화에 따른 지역 내, 나아가 범세계적 핵 비확산 노력에 대한 부정적 파급효과 때문이다.
지난 9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북한의 핵 정책이 바뀌려면 한반도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며 절대로 먼저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 위원장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한 말은 맞다. 북한을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다시 끌어내려면 미국이 어느 정도 신축성을 보여야 한다. 협상에서 강자는 약자에게 그런 신축성을 보일 책임이 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핵 무력을 법제화한 것은 기존 사실, 즉 북한이 핵 국가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북한은 지금껏 핵 개발을 위해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고, 그런 노력의 결과 지금 완전한 핵무기 국가라는 것을 공표했다. 나는 2010년 북한 영변 핵단지를 직접 목격했고, 이후 국무부 소속으로 두 번 더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북한의 핵 능력은 실존한다.
지난 8월 윤석열 한국 대통령이 제안한 ‘담대한 구상’은 어떻게 평가하나?
구상은 좋은데 이런 제안을 공개적으로 내놓는 바람에 호사가들의 비난거리가 됐다는 게 문제다. 이런 제안이 성공하려면 비밀 회담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진전을 볼 수 있다. 또한 점진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북한 문제를 다뤄본 내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북한에 특사라도 보내란 말인가?
그렇다. 국가정보원장이나 국가안보실장처럼 최고위직 인물을 보내면 어떨까? 물론 그 과정에서 미국과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과거 남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 때도 2018년 북·미 정상회담 교섭을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하지 않았나.
북한은 ‘담대한 구상’을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재판이라며 일축했는데.
‘담대한 구상’은 상당히 포괄적이고, 일부 내용은 좋다.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펌프질을 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점이 한국 측에 엿보이지 않는다. 대북 구상과 관련해 한국 측은 처음부터 항상 크게 가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는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다음은 신뢰 회복이다. 큰 합의를 얻으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우선 남북한이 상호 신뢰를 쌓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미국도 이걸 제대로 인식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은 미국 정부 고위 관리들이 북한에 초점을 두는 것 같지도 않다. 아마도 북·미 협상이 재개되려면 바이든 행정부가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바이든 행정부가 지난해 ‘조준된, 실용적 접근책(calibrated, practical approach)’이란 대북 노선을 내놓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고, 성과도 아직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비핵화 협상을 사실상 포기하고 핵무장을 더욱 강화하기로 나선 것 같다.
김 위원장과 서명할 준비가 돼 있는 협상안이 없었으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알기로 당시 회담은 대북 제재 완화 문제로 인해 실패했다. 당시 미국은 대북 제재 완화와 관련해 북한에 고깃덩어리를 주는 대신 ‘고기 맛’만 보여주려 했다.
북한은 비핵화 방법과 관련해 단계적인, ‘행동 대 행동’ 방식을 선호해왔다. 하지만 이마저 김 위원장이 핵 협상 무용론을 선언해 불투명한데.
어떻게든 북한을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 대안이 없지 않나? 안 그러면 남북한 무기 경쟁이 촉발되고, 결국 전쟁까지 가지 말라는 보장이 있나? 북한이 내세운 단계적 비핵화 방안이 나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북·미 양측이 서로에 대한 불신의 수준을 감안할 때 비핵화 협상에서 성과를 얻으려면 아마도 그게 유일한 접근책일 것이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진 지 30년이 지났다. 비핵화 협상 실패의 원인을 뭐라고 보나?
일부는 북한 측이고, 일부는 미국 측 책임이다. 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 하나 있다. 과거 한국에 수백 개의 전술핵무기를 배치해서 핵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북핵 문제를 푸는 건 매우 힘겨운 작업이다. 하지만 당사국들이 핵 문제를 풀려는 결의를 계속 다지는 게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리처드 하스 전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이 최근 기고문에서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기에 앞서 대북 제재 완화를 대가로 북한 핵무기와 미사일을 제한하는 군축 제안을 고려할 것을 주장했는데 어떻게 보나?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현 단계에서 북한의 핵 위협을 봉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현실을 직시하고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제한해 한반도를 더욱 안정시키기 위한 군축회담을 개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미국도 어느 시점에선 북한이 핵무기 국가라는 현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아가 미국은 북핵 문제를 상시적으로 전담하는 특사를 둬서 군축 방안을 강구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 및 일본 등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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