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취향을 파다 ‘디깅(digging)’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2022. 11. 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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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파고 있습니까?

‘디깅’(digging)이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들린다. 사전적으로 ‘파기, 채굴’ 등을 뜻하는 디깅은 라이프스타일의 범주로 들어오면 어떤 것에 꽤 집중하여 파고 드는 걸 의미한다. 뭔가를 잡고 판다는 뜻이다. 그렇게 다들 무언가를 파니까 이게 트렌드가 되었다.


▶영화와 책, 음악을 디깅하다

OTT가 영상 플랫폼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기 이전부터 필자는 해외 드라마 ‘덕후’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총 6개의 시즌으로 마무리된 ‘로스트’라는 시리즈에 푹 빠져 있었던 적이 있다. 크레딧을 유심히 살피며 웹 서핑을 했더니 영화 감독이자 제작자인 J.J. 에이브람스가 제작한 작품이었다. 그가 뭘 제작했는지 좀 찾아봤다. ‘프린지’라는 시리즈를 만들었고,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시리즈를 만들었지 뭔가. 보통 시리즈 시즌 하나가 1년 주기로 공개되니 ‘로스트’는 6년을, ‘프린지’와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는 5년을 곁에 끼고 산 셈이다. 대략 2004년부터 2016년에 이르는 약 12년의 세월 동안 필자는 J.J. 에이브람스가 제시하는(그는 영화와 시리즈를 통틀어 평행우주론을 꽤나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계관에 푹 빠져 있었다. 시리즈 한 작품에서 시작, 제작자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며 그의 세계관을 ‘디깅’한 거다.

필자는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90년대 초반 즈음엔 펑크 록이라는 음악 장르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영국 밴드 ‘섹스 피스톨즈’에서부터 폭발한 이 펑크 무브먼트가 당시 20대였던 필자의 가슴 속에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20년쯤 지난 후에 펑크 록을 처음 알게 되면서 자료를 찾고, 음악을 찾아 헤맸다. 그랬더니 1960년대 뉴욕의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도출됐고, 그 이전의 펑크 록을 연주했던 ‘레이먼즈’라는 밴드도 발견했다. 섹스 피스톨즈와 유사 시기에 등장한 ‘더 클래시’의 음악이 발견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 ‘그린데이’ 등과 같은 밴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그 1990년대에 한국에서도 ‘크라잉 넛’, ‘노브레인’과 같은 펑크 록 밴드들이 제3의 문화를 주도하는 기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필자는 펑크 록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디깅’을 한 것이다.

또 다른 과거에는 한 권의 책에 꽤나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콜롬비아 출신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그것.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내가 읽었던 그 두꺼운 페이지들이 거대한 판타지였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 마술적 사실주의라 평론가들은 칭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갑자기 남미 문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을 찾아 읽었다. 이렇게 남미의 위대한 문학가를 찾았더니 루이스 세풀베다에 닿았다. 전작을 섭렵한 건 아니지만 그의 동화책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는 읽은 지 십수 년이 흘렀건만, 지금도 곁에 두고 있는 서적 중 하나다. 아무튼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 남미 문학에 대한 탐구는 꽤 오래 지속되었던 것 같다. 역시나 나는 문학 역사 속 남미 문학에 일종의 ‘디깅’을 한 셈이다.

한창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고, 공부하고, 그걸 업으로 삼았던 시절. 필자의 방 한 편에는 VHS 비디오 테이프를 대체하며 영상 미디어의 신문물(로 남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폐기물이 되어가고 있는)로 낙점된 DVD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음악 CD도 넘쳐날 만큼 쌓여 있었다. 직업의 특성상 리뷰를 위해 제공 받은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내 관심사의 확장에 의해 구입한 것들이 더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멍청한 행위가 아니었나 싶은데, 현재 그것들은 자산이 아닌 추억의 기록이자, 버리지도 사용하지도 못하는 일종의 고급 취향 쓰레기로 여전히 집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그런 소비를 오래도록 해왔고, 그것이 어느 정도 부질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필자는 또 다른 것들을 수집하고 있다. 바로 바이닐 레코드다. CD와 DVD 시대를 넘어 이제는 바이닐 레코드를 모으고 있는 셈이다. 온라인 숍에서, 때로는 오프라인 레코드 숍에서 그 판들을 뒤지는 희열이란! 아무튼 필자는 지금도 ‘디깅’을 하고 있다.

▶2023년 다시 주목 받는 ‘디깅 모멘텀’

필자는 지금까지 ‘디깅’이라는 말을 수차례 사용했다. 영어로 ‘digging’이라 쓰여지는 이 말은 우리 주변에서 꽤나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다. 사전적으로 파기, 채굴 등을 뜻하는 디깅은 라이프스타일의 범주로 들어오면 어떤 것에 꽤 집중하여 파고 드는 걸 의미한다. 문화적 측면에서 디깅은 오랫동안 존재했던 행위다. 하지만 트렌드적 측면에서 이 단어가 부상하게 된 건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였다. 이제 다시 한번 디깅이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로 대두된다.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디깅 모멘텀’을 제시하면서부터다. 예전에는 상식이라는 측면에서 지식의 범위가 넓고, 깊이가 심오한 이를 두고 ‘박학다식’하다는 표현을 했다. 현대에 들어 지식의 범위는 포털 사이트 검색 만으로도 충분히 확장된다. 그러니까 굳이 머리 속에 많은 정보를 저장할 필요가 없다. 이제 깊이가 중요해졌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건 그냥 다 알고 있는 게 됐다. MZ세대의 라이프스타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취향’이다. 자, 취향에 맞으면 소비는 물론이고 무엇이든 하는 게 새로운 소비자 유형이다. 취향에 맞으면 파헤치기 시작한다. ‘디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누구나 하나쯤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

이제 모든 분야, 범주가 디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시대다.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디깅을 세 가지 정도로 범주화한다. 청춘 시절의 필자가 해외 시리즈에 열광하고 파고 들었던 사례는 아마 현대화된 디깅의 범주에서 첫 번째 ①‘콘셉트형’에 부합할 것 같다. 이 콘셉트형 디깅은 어떤 콘텐츠에 몰입하는 걸 뜻한다. 필자처럼 감독 하나에 꽂혀, 시쳇말로 ‘난 한 놈만 두들겨 팬다’는 식으로 깊게 침투하는 방식이다. 콘셉트형 디깅의 경우는 주로 콘텐츠 소비에서 많이 생겨난다. 특히 머신러닝 즉 AI 추천 테크놀로지가 급속도로 발전한 현대에 들어 스스로 찾는 방식과 더불어 기계적 추천에 의한 디깅까지 곁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 취향 맞춤 콘텐츠가 자동적으로 모바일 기기 메인에 생성되어 추천해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알고리즘을 통해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콘텐츠 추천의 연쇄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유튜브 채널에서 뭔가를 하나 시청하면 연관된 콘텐츠들이 우후죽순 추천되는 방식인 셈이다. SNS에서도 그렇고, OTT에서도 그렇다. 과거에는 스스로 디깅을 해야 했다면 요즘은 크게 공들이지 않고도 취향에 맞는 자동 디깅이 가능해졌다.

디깅 모멘텀의 두 번째 유형은 ②‘관계형’이다. 과거 연예인 또는 아이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뽐내는 이들을 ‘덕후’라며 조금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부끄럽지 않은 행위가 되었다. 어쩌면 BTS 팬덤인 ‘아미’가 팬덤 자체를 일종의 문화로 이끌어 올린 덕이 크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 아이돌 팬덤인 게 스스로의 취향이 되었고, 그들을 위해 디깅하고, 또 소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계형 디깅은 일종의 ‘덕밍아웃’이라 불리는, ‘나는 OOO의 팬덤 소속이야’를 되려 자랑스럽게 만든다. 동시에 이 같은 관계형 디깅은 ‘덕후’와 조금 달리 공통 취향을 가진 이들의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아이돌 팬덤이 대표적 예이지만, 과거부터 존재하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팬덤, 재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 팬덤도 수면 위로 부상하며 대중적 디깅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아주 예전부터 존재하던 ‘스타워즈’ 및 ‘스타트랙’ 등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 팬덤도 마찬가지다. 디깅을 통해 자연스레 형성된 관계는 때로 소비자로서의 힘을 확장하게도 만든다. 굳이 문화 콘텐츠가 아니더라도 디깅은 브랜드, 기업 등에도 존재할 수 있기에 그렇다. 뭉친 소비자의 발언이 큰 영향력을 가진다는 걸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 않던가.

마지막으로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로서의 디깅 모멘텀 범주의 하나는 ③‘수집형’이다. 사실 이는 콘셉트형과 관계형 디깅을 통해 공통적으로 도출되는 일종의 ‘소비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자신의 취향에 비추어 디깅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 파생 상품을 ‘컬렉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것이 너무 좋은데 그것이 담긴 어떤 물리적 상품에 욕심을 내지 않을 이가 없을 테니까. 동시에 라이프스타일 트렌드에서 인테리어 분야는 우리네 삶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취향이 담긴 물건을 자신의 공간에 둔다는 것만큼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디깅 덕에 세상은 과거 대비 굉장히 풍족해진 ‘굿즈’들이 넘쳐난다. 꼭 문화 콘텐츠 굿즈가 아니더라도 이 같은 수집형 디깅 모멘텀은 특정 브랜드 제품 등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특별한 운동화를 꼭 가지려 하는 취향도 디깅에 동참하게 만든다.

혹자는 슈프림과 같은 브랜드의 수많은 제품들을 컬렉션하기도 한다. 아이돌 팬덤에서 멤버들의 각종 굿즈를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근 아이들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던 ‘포켓몬 빵’에 삽입되어 있는 띠부실을 모으기 위해 편의점 오픈런을 하는 것 역시도 해당된다. 세 가지 디깅 유형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조금 더 개인적이고, 내부적 행위였다면, 마지막 세 번째 수집형 디깅은 좀 더 공적이고 외향적 행위로 발전된 것이다. 수집은 곧 자랑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과시로 발전될 수도 있다.

▶디깅을 통한 행복의 성취가 트렌드로

그렇다면 이와 같은 디깅 행위가 어떻게 대중적 트렌드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이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취향을 통한 행복의 성취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디깅의 대상, 형태, 방법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런데 최종 목적은 동일하다. 바로 행복감이다. 그걸 얻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쏟고, 지갑을 연다. 성취하는 과정에서 투입되는 노력이 치열할 수록 얻는 행복감은 더 배가된다. 예를 들어 스티커 한 장을 위해 줄을 서서 획득했을 때, 동일 팬덤 내에서도 경쟁이 치열한 어떤 굿즈를 쟁취하기 위한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이런 노력의 투입에 의해 얻어진 결과는 뿌듯함과 동시에 성취감까지 전달하기에 행복은 더 커진다는 의미다. 이렇게 행복을 누렸을 때 우리의 인생은 한 단계 성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디깅은 모멘텀이라는 어떤 기회적 의미까지 곁들이며 다시 한번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로 각광받는다.

디깅이 어떻게 성장의 근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필자의 예를 들어봐도 좋을 듯하다. 나는 여전히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일종의 디깅 행위로서 수많은 시리즈에 매료되고, 몰두하고 있다. 어찌됐건 많이 보다 보니 여전히 시리즈에 대한 원고 청탁이 종종 들어오기도 한다. 그간 많이 본 시리즈의 총합이 내게는 일종의 지식으로 자리하며, 내러티브 관련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드라마를 수없이 시청함으로써 내 라이프스타일 중 일부를 업그레이드한 셈이다. 음악에 대한 디깅 역시 마찬가지다. 팝으로 시작해, 록 뮤직을 접하고, 펑크를 알고, 사이키델릭 록을 공부하고, 프로그레시브 및 아트 록을 학습함에 의해 정점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뮤직 히스토리를 체계적으로 학습했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직업적으로 내게 큰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끔 음악에 대한 글을 쓸 기회도 있고, 또 어떨 땐 음악 경연 심사를 맡을 때도 있었다. 이런 필자의 경험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각자 취향에 따른 디깅 행위를 찬찬히 되짚어 볼 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디깅을 통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벗을 만나게 된 것 역시 성장의 일환이니 말이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디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의 관습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이들이 영화, 공연, 뮤지컬 등을 ‘N차 관람’한다고 한다. 이건 분명 하나의 콘텐츠에 대한 디깅이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는 보면 볼수록, 그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평균적으로 1초에 24장의 사진이 휘리릭 지나가버리는 영화 장면들이 첫 번째 관람에서 단박에 기억되긴 쉽지 않다. 그렇기에 디깅할수록 지난번 관람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 발견하게 된다. 디깅은 또한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필자는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레코드 숍을 발견했을 때 뭔가 홀린 것처럼 빨려 들어간다. 그래서 어느 덧 바이닐 레코드를 뒤적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속에서 보물과 같은 앨범을 찾으면 무척 행복해진다. 모든 이가 관습처럼 때로는 습관처럼 디깅을 하고 있다. 천차만별의 디깅 방식과 대상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국 스스로 추구하는 건 그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행복이다. 누구에게나 디깅 모멘텀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디깅은 자연스레 트렌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글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참고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3』(김난도 외 저 / 미래의창 펴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54호 (22.11.1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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