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또 자존심 구겼다…우크라 남부 헤르손서 철군 명령
우크라軍 보급로 차단 전술에 밀려 퇴각
"휴전협정 단초 vs 시가전 유도 전략"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부 요충지인 헤르손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시가전 유도 전략을 우려하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이번 철군을 두고 러시아군의 의중에 대한 분석이 엇갈리고 있다.
러軍, 헤르손서 철수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9일(현지시간) TV 브리핑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군에 헤르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쇼이구 장관은 “군대를 철수해 이동하라. 병력과 무기가 안전하게 드니프로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우크라이나 주재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인 세르게이 수로비킨도 “최대한 이른 시점에 철수를 시도할 것”이라며 “헤르손 인근에 있는 드니프로강 서쪽을 빠져나와 건너편인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군이 전면 철수하게 되면 우크라이나는 개전 후 약 260일 만에 헤르손을 탈환하게 된다. 지난 2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처음 점령한 곳이 헤르손이다. 우크라이나 남부를 관통하는 드니프로강 옆에 자리 잡은 도시다. 2014년 러시아가 강제병합한 크름반도의 관문이자 남부 지역의 수력발전·상수원을 관할하는 요충지다. 지난달 5일 러시아는 헤르손을 비롯해 자포리자, 동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등 4개 지역을 합병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해 헤르손이 범람 위기에 놓여 철수한다고 해명했다. 헤르손 인근에 있는 수력발전댐인 노바카호바카를 겨냥해 발포했다는 주장이다. 수로비킨 최고사령관은 “더는 헤르손시에 대한 보급 활동을 이어갈 수 없다”며 “11만 5000명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되레 러시아군이 수력발전댐을 폭파하려 했다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군의 작전이 성공했다고 입을 모은다. 러시아군은 지난달 19일부터 헤르손 주민에게 소개령을 선포했다. 주민들을 이주시킨 뒤 도시를 병참기지로 탈바꿈하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의 정밀 타격으로 피해가 누적됐다. 크림대교 등 주요 보급로마저 차단되자 군대를 물린 것으로 분석된다.
우크라, 신중론 속 시가전 우려
러시아의 철군 명령에 우크라이나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자칫 러시아군이 도시를 비워놓은 척 위장해 시가전을 유도할 수 있어서다.
이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헤르손 철수를 두고 “(우리의) 필사적인 노력과 방위 작전의 결과다”라며 “하지만 적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지 않고 선의의 제스처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불필요한 위험 없이 우리의 땅을 모두 해방시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주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의회의 국방정보위원장인 로만 코스텐코도 “지난 9일까지 러시아군의 퇴각 징후를 추적했지만 아직 드니프로강을 건넜다는 정보는 없다. 완전히 철수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며 “오히려 우리 군을 도심으로 끌어들이려는 계책일 수 있다”고 경계했다.
러시아가 쉽사리 헤르손을 포기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흑해로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이면서 남부 오데사항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라서다. 헤르손을 넘겨주게 되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수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타격이 크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지난 9월 헤르손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러시아 장교들의 의견을 모두 묵살했다. 그는 후퇴를 거부하며 현장 지휘관들에게 “전략은 내가 세운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철군을 절대 반대하던 푸틴 대통령이 굴욕을 감수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푸틴이 미치광이는 아냐”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전략을 바꿨다는 반론도 나온다. 서방국가와 갈등을 이어오던 걸 멈췄다는 분석이다. 러시아가 공세를 멈추고 휴전협정에 돌입하는 첫걸음이라는 반박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퇴각 명령 시점에 주목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맺은 곡물 수출 합의에 복귀한 지 7일 만에 철군 명령이 떨어졌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서방국가에 화해의 제스쳐를 보낸다는 해석이다.
러시아 전문 정치연구센터인 R.폴리티크의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센터장은 “푸틴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며 “이번 철군은 그가 얼마나 실리를 추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철군 명령을 공개적으로 내린 것도 이례적이란 분석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군대가 퇴각할 때는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한다. 러시아군은 공개 석상에서 후퇴를 발표하며 전략을 수정해왔다. 지난 3월 키이우 공략에 실패한 뒤 퇴각 명령을 내리며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를 공략했다. 8월에는 북동부 하르키우에서 철수한 뒤 남부와 동부 4개 지역을 합병했다.
폴란드의 군사분석업체 로찬컨설팅의 콘라드 무지카 이사는 “군사 전술의 관점에서 볼 때 퇴각 명령을 공개한 건 말이 안 된다”며 “이번 철군 발표는 분명 전략의 전면 수정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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