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 묻으며 "찾아오겠다"…34년간 약속 지킨 참전용사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전우와 함께 영면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나는 한국에 올 때 소년이었지만 떠날 때는 남자가 돼 있었다."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사후안장 되는 영국군 6·25전쟁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 씨가 2019년에 남긴 생전 기고문이 최근 부산 남구가 발행한 참전용사 추모 특집 매거진에 실리며 조명을 받고 있다.
그룬디 씨는 19세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6·25전쟁에 참전해 '시신 수습팀' 대원으로 활약했다. 한반도 곳곳을 다니며 전우들의 주검을 수습해 부산의 묘역까지 운반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룬디 씨는 기고문에서 한국전쟁의 참상을 또렷하게 기억했다고 밝혔다.
그는 "19세 청년 군인들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고 대부분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어 "전투 현장에 남겨진 전우들의 시신을 찾아서 수습하는 일이 우리 팀의 임무였다"며 "무더운 여름에는 논바닥에서 거품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 그곳을 파보면 어김없이 시신이 묻혀있었다"고 참혹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또 "5개월 간 내버려진 시신 3구를 수습했는데 신원 파악이 쉽지 않아 부산 유엔묘지에 무명용사로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 안타까운 심정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은 영국 병사들을 비롯해 북한군, 한국군, 미국군 등 90구에 가까운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며 "이들은 다행히 신원이 파악 가능해 묘비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국을 매년 찾아온 이유도 기고문에서 설명했다.
그는 "40년간 매년 한국을 혼자서 방문하고 있다"며 "부산에 오면 수양 손녀이자 유엔기념공원에서 일하는 박은정 씨 집에서 머무는데, 그녀는 전쟁에서 내가 경험한 것들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나를 세상 밖으로 인도한 인물"이라고 밝혔다.
그는 기고문에는 쓰지 않았지만 전우를 매장할 때마다 "반드시 다시 찾아오겠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88년부터 매년 한국을 찾아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고 2019년에는 부산 남구 명예시민으로 위촉됐다.
그는 오랜 암 투병 끝에 지난 8월 영국에서 숨졌고 수양 손녀 박은정 씨가 유해를 국내로 봉환했다.
그는 암 투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지난 5월에도 방한을 희망했다고 한다.
수양 손녀 박은정 씨는 10일 "2006년 유엔기념공원에서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비행기를 20시간이나 타고 매년 한국과 영국을 오가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며 "34년간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고 부산으로 돌아온 할아버지가 이제 전우 곁에 잠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룬디 씨는 전 세계인이 부산에 잠든 참전용사를 향해 묵념하는 오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 전우 곁에 영원히 잠든다.
다음은 그룬디 씨가 생전에 "한국에 소년으로 왔다가 사나이가 되어 돌아갔다"는 제목으로 쓴 기고문 전문이다.
나는 1931년 6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에클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은 몹시 가난했고, 삶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네 살 되던 해 어머니가 36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고 고아원에서도 생활했다. 열네 살에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이때가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농장을 떠나 고향 에클스로 돌아왔다. 이후 18개월간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여러 부대를 거쳐 군 복무를 이어가면서 군대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게 되었다. 군 복무 중 조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슬픔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군 생활을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 시절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18개월 의무 복무기간을 마친 뒤, 나는 직업군인이 되어 10년 더 복무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직업군인이 되자마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어떤 나라가 침공을 당해 전쟁이 났는데, 그 나라로 파병을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1951년 1월 말, 1천명의 동료 군인들과 함께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이라는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군함에 몸을 실었다. 대부분 한 번도 배를 타 본 적이 없어 다들 멀미로 고생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서로를 돌봐가며 힘든 항해를 견뎌낼 수 있었다.
며칠간의 항해 끝에 배는 항구에 닿았고, 배에서 내려 짧은 시간이지만 편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한국으로 가는 동안 19세의 청년 군인들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했고 자신들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2월 초가 되어서야 우리가 타고 온 군함이 부산항에 도착했고 그동안 함께 지낸 동료들과 작별을 할 때가 왔다. 그리고 이젠 한국에서 어떤 운명이 우리를 기다릴지가 조금씩 피부로 와 닿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자 미국 흑인 밴드의 열정적인 음악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조선소에 마련된 환영장에서 커피와 도넛을 받았다. 이후 트럭을 타고 세 개 남짓의 침상과 담배, 커피, 차, 샌드위치 등을 파는 매점이 있는 어느 열악한 부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사흘을 보낸 뒤 동료들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지만 나는 그곳에 남으라는 지시를 받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부대장과 면담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부대장은 나에게 인사를 한 뒤 앉아서 내가 한국에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나에게 "그룬디, 자네가 꼭 맡아서 처리해줘야 할 일이 있네"라고 말했다. 그 일은 내가 영국에서 잠시 일했던 장례 업무와 관련된 것이었고 부대장은 이 일은 어디까지나 자원해 맡아야 할 일임을 알려줬다. 그리고 그 일에 필요한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통신장비와 소총을 든 한국인 병사를 소개받고 미국, 호주, 뉴질랜드 병사와 함께 한 팀이 돼 전투지역으로 나갔다. 전투 현장에 남겨진 전우들의 시신을 찾아서 수습하는 일이 우리 팀의 임무였다. 우리는 시신이 묻혀있는 곳이 표시된 지도를 들고 임무를 수행했다. 우리 팀에 작은 트럭 한 대가 주어졌고 뉴질랜드 병사가 운전을 맡았다. 장비를 챙겨 그 트럭을 타고 3일간 임무에 나섰다. 우리 팀은 부산에서 대구 사이 전투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지역이 너무 넓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모든 지시사항을 숙지한 뒤에 대구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우리는 북한군과 언제 마주칠지 몰라 늘 경계를 해야 했지만, 다행히 북한군과 그렇게 많이 만나지는 않았다. 처음 이틀은 추운 날씨 때문에 땅이 얼어 시신 수색 작업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날씨가 좀 더 풀리면 다시 찾기로 하고 일단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지도에는 시신이 남아있는 스무 군데의 지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논이 있는 어느 지역을 수색할 때였다. 3명의 영국 병사가 묻혀있다는 정보 덕분에 우리 팀은 어렵지 않게 시신 3구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들은 5개월 동안 그곳에 내버려져 있었다. 보통 시신에는 신원을 알 수 있는 수첩이나 군번줄 같은 소지품들이 있기 마련인데, 문제는 이 시신들의 소지품들이 서로 섞여 있어 누구의 것인지 신원 파악이 쉽지 않았다. 수습한 3구의 시신을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로 보냈는데, 끝내 각자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무명용사로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와 우리 팀은 처음 방문했다가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지역을 다시 수색했다. 그 결과 미군 병사 1명과 영국군 병사 1명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시신 2구를 깨끗이 수습한 뒤 유엔묘지에 안장했는데, 다행히 이들 두 사람의 신원은 파악이 되어 묘비에 이름을 새겨줄 수 있었다.
날이 차츰 풀리면서 우리는 더 많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소수이지만 북한 병사들도 있었다. 미군 유해도 수습했는데 영국 병사들의 시신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는 논바닥에서 거품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 그곳을 파보면 어김없이 시신이 묻혀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우리 팀이 수행하는 임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어느 정도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
여러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은 영국 병사들을 비롯해 북한, 한국, 미국 등 90구 가까운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행스럽게 신원 파악이 가능해 묘비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
그렇게 한국 복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근무를 한 뒤 나는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 진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2008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은퇴한 지금, 40년간 매년 한국을 혼자서 방문하고 있다. 한국에 갈 때면 DMZ(비무장지대)에 별장을 가진 한국인 친구 이동수 씨와 함께 그곳을 방문한다. 부산에 내려오면 유엔기념공원과 멀지 않은 수양 손녀의 집에서 머문다.
이 이야기를 끝맺기 전에 나는 특별한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내가 전쟁 때 맡은 임무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남들한테 이야기할 수 있게 수년간 도와준 사람이다. 바로 수양 손녀 브렌다(한국명 박은정)이다. 처음 브렌다를 만난 것은 2006년이었는데, 당시 유엔기념공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브렌다는 내가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쟁에서 내가 경험한 것들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고 언급하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내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2010년 브렌다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브렌다와 그녀의 한국인 남편 로버트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모두가 나에게 너무도 친절하다. 나는 부산과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그들 집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나는 한국에 올 때 소년이었지만 떠날 때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handbrother@yna.co.kr
▶제보는 카톡 okjebo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하늘나라서 행복해야 해"…7세 초등생 친구·주민들 추모 발길(종합) | 연합뉴스
- '이선균 협박' 유흥업소 여실장, 3차례 마약 투약 징역 1년 | 연합뉴스
- 공군 또 성폭력…군인권센터 "여군 초급장교에 대령 성폭행미수"(종합) | 연합뉴스
- '폭풍군단' 탈북민 "살인병기 양성소…귀순유도 심리전 통할 것" | 연합뉴스
- 래몽래인 경영권 이정재 측에…'아티스트스튜디오'로 사명 변경 | 연합뉴스
- '소녀상 모욕' 미국 유튜버, 편의점 난동 혐의로 경찰 수사(종합) | 연합뉴스
- "머스크, 480억원 들여 자녀 11명과 함께 지낼 저택 매입" | 연합뉴스
- 동업하던 연인 살해 40대, 피해자 차에 위치추적 장치 설치 | 연합뉴스
- 검찰 '재벌 사칭 사기' 전청조 2심서 징역 20년 구형 | 연합뉴스
- 친모·친형 태운 차량 바다에 빠트려 살해한 40대 중형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