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위로가 필요할 때
10월 29일, 세종시에서 강의를 한 뒤 지인들과 저녁을 먹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서울에 도착할 무렵, 이태원 압사 참사를 알게 되었다. "어머나, 어떡해." 그 후로 단톡방에서는 계속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글이 분 단위로 이어졌다(언론사에서 일하는 나의 직업적 특성이다). 다소 늦은 시간 집에 도착해서 텔레비전을 틀었을 때 사고 지점인 해밀톤호텔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앰뷸런스와 경찰, 인파로 뒤엉켜서. 자정을 넘겨 두 시간 정도 뉴스를 본 것 같았다. 아이들은 엄마가 너무 감정 이입해서 뉴스를 본다고 한소리 했다. '그런가?' 생각하고 있을 그때였다. 중3 딸아이가 핸드폰을 들고 나왔다.
"엄마, 이 사고 영상 좀 봐."
"뭐야, 이거."
"사람을 빼내려고 하는데, 안 빠지는 것 같아."
"어머나 세상에... 그런데 이 뒤 사람들은 왜 그냥 서 있어?"
"엄마, 이 사람들 못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그냥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뭐, 뭐라고? 아, 안 되겠다. 너도 이제 그만 자라. 더 보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뉴스에서는 적어도 이런 장면들은 거르는데, 모자이크 처리도 하고. SNS는 너무 적나라하다. 이건 정말 좋지 않은데... 문제인데..."
잠을 자러 갔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제발 더 이상 피해자가 없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떴다. 세상에나. 아침에 일어나니 사망자가 150여 명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뉴스 속에 살았다. 저녁 무렵 잠이 쏟아졌다. 다음날인 월요일 나는 사건 소식을 다루는 기사를 편집하지도 않았는데, 하루 종일 관련 뉴스를 본 기분이었다. 단톡방에서 새로운 뉴스를 알리는 알람이 계속 울려댔기 때문이다. 이날도 퇴근을 하자마자 쓰러졌다. 잠이 계속 왔다.
다음날 같이 일하는 팀원의 코로나 확진 소식. 하루 종일 혼자 말없이 일했다. 단톡방은 쉴 틈이 없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소식이 "까톡까톡" 울렸다. 대충 봐도 슬프고 화가 나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퇴근을 하자마자 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이틀은 오래 전에 예정된 연차였다. 뉴스를 일부러 보지 않았다. 단톡방 소식도 덜 확인했다.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래도 저녁만 되면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며칠을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잠을 잤다. 꽤 걱정스러웠는지 남편이 놀라 물었다.
"왜 그래? 요즘, 왜 그렇게 잠을 자?"
"몰라, 일만 끝나면 계속 잠이 쏟아져."
트라우마를 걱정하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가. 가끔씩 멍 때리다가 보면 그 장면이 생각났다. 꼼짝 않고 벽처럼 서 있던 사람들. 끔찍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예술의 전당이 생각난 건 그때였다. 갑자기 무슨 공연을 하는지 궁금했다. '애도기간에 예정된 공연이 취소되기도 한다는데 여긴 어떻지?' 다행히 갑작스럽게 취소되는 공연은 없는 듯했다. 그중 나의 눈길을 끈 공연은 '친애하는 프란츠에게'라는 정한빈 피아노 리사이틀이었다. 같은 이름의 두 거장, 슈베르트와 리스트의 작품들을 연주하는 공연이었다. 공연 하루 전날인데도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내일 갈까? 혼자? 혼자면 어때? 클래식 공연은 혼자 보는 게 편하지 않아? 옆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좋잖아. 누구의 위로 따위 없으면 어때. 내가 해주면 되지. 그래, 음악으로 위로받고 오자.'
그날 프로그램 1부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소나타 가장조'와 '즉흥곡 중 제 3번 로자문데', 2부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 베네치아와 나폴리' 그리고 '메피스토 왈츠'였다. 공연 90분에, 앙코르 곡 2곡까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익숙한 곡은 아니었지만,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가끔은 울컥한 마음도 들었다. 내 마음을 건드린 멜로디가 군데군데 숨어 있다 그의 손가락에 불려 나와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연을 보고 난 뒤의 내 소감은 당황스럽게도 '리스트가 나빴네'였다. 나란히 포갠 피아니스트의 두 손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를 만큼, 손가락 입장에서 보면 혹독하고, 청중 입장에서 보면 꽤나 강렬한 연주였기 때문이다. 첫 앙코르를 준비할 때 웃으면서 "리스트 곡은 못 치겠네요"라는 그의 농담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니 튕겨져 나갈 만큼 빠른 속도로 쳐내야 하는 곡. 대체 리스트는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연주하기 힘든 곡을 쓴 걸까. 그리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들은 왜 이 곡을 칠까. 피해 가고 싶을 텐데... 어쩌자고 공연곡으로 삼아 연습하고 연습하고(연습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무대에까지 서게 되는 걸까(틀리지 않을까 싶어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하려나).
고민 끝에 내가 생각한 것은 '성취'였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에 도전하고 성취했을 때의 그 감동, 카타르시스를 알기 때문에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 걸음씩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당연히 예술가들만 그런 것은 아닐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 그런 자극 또한 삶의 즐거움 중 하나일 테니까.
그래서 이날, 이 공연으로 충분히 위로가 되었냐고? 되었다. 충분히 되었다. 공연장을 나와 바깥을 보니 세상 모든 것이 다 감동이더라. 5일 오후 2시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나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술의 전당에 이렇게 감나무가 많았나 싶고 나도 모르는 사이 가을은 한층 깊어졌고 나도 한 뼘 성숙해진 기분이었다.
공연을 보지 않아도 좋았을 것 같았다. 이 공간에 있는 자체만으로도, 지금이 아니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다시 잘 살고 싶어졌으니까. 그러니 위로가 필요할 때는 예술의 전당으로 가자. 음악이 흐르는 낯선 공간에서 혼자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갬성'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을 테니. 기분이 좋지 않거나 무력감에 빠졌을 때, 나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비밀 아이템을 하나 찾은 기분이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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