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자 싫어” 러 점령 뒤 두 동강 난 우크라 마을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의 작은 마을 셰우첸키우카에 사는 할리나 필리펜코(62)는 며칠 전 빵을 나눠주러 찾아온 이웃 올랴 프로드첸코(45)를 거세게 내몰았다.
올랴의 남편은 얼마 전 우크라이나군이 마을을 수복한 뒤, 러시아 점령 때 부역한 혐의로 이틀 동안 억류됐었다.
드니프로강 서안에 자리한 마을은 개전 직후인 지난 3월 중순 러시아군에 점령됐다가, 10월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공세를 통해 해방됐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러, 우크라 침공]
러시아군에 점령되었던 우크라이나 남부 일부 지역은 우크라이나군의 진격과 함께 다시 이전처럼 우크라이나 영토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남아 러시아군의 혹독했던 치하를 견뎌내고 우크라이나군을 다시 맞이한 주민들 사이에는 되돌리기 어려운 의심과 불신, 분열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8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의 셰프첸키프카(Shevchenkivka)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 50여명은 지난달 중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들어올 때 열렬히 환영했다. 며칠 뒤 올리아 프로드첸코(45)은 우크라이나군에게서 받은 빵을 집집마다 나눠주고 있었다. 그러나 할리나 필리펜코(62)는 빵을 거절하고 올리아를 돌려보냈다. 할리나의 아들은 우크라이나군에 입대해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그는 뒤돌아서는 올리아의 등에 대고 “러시아군 협력자는 내 집에 오지도 말라”고 외쳤다. 올리아의 남편은 우크라이나군이 마을에 들어온 뒤 러시아군 부역 혐의로 이틀 동안 억류되었다 풀려났다.
러시아군이 평화롭던 마을 셰프첸키프카에 온 건 3월 중순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러시아군이 아니라 분리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동부의 이른바 ‘도네츠크인민공화국’ 소속 병력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고문과 폭력을 행사하고 집단학살했다는 의혹이 거세지만, 세프첸키프카에선 그렇게 험한 꼴은 없었다.
마을 주민 스베틀라나 이바크넨코(50)는 “병사들은 우리처럼 말했고 같은 우크라이나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리 전쟁준비가 돼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병사들은 민가에 찾아와 식료품과 휘발류 등을 교환해갔고, 물도 배달해 주었다. 테티아나 보후셰프크카(54)는 집을 자주 찾아온 올레라는 이름의 젊은 병사와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테티아나는 “좋은 젊은 친구였다. 그냥 집에 돌아가고만 싶어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점점 병사들은 주민들에게 개인정보 제공을 요구하고 러시아 여권을 신청할 것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주민 중에서도 이웃에 같은 권유를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스베틀라나와 올리아도 그런 이들이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이에 대해 스베틀라나와 올리아는 러시아군에 협력하거나 러시아 여권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나디아 폴리베사(46)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 협력자를 찾을 때 올리아의 남편이 러시아군에 고자질해 우리 아들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야 했다”고 분개해 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러시아군은 집집마다 찾아와 한 사람당 5천 흐리우냐(우크라이나 화폐 단위, 약 18만원)씩 나눠줬다. 테티아나는 받지 않았다. 그는 “피묻은 돈을 받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할리나도 우크라이나군에 입대한 아들 생각에 돈을 받을 수 없었다. 올리아는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 주저없이 돈을 받았다. 스베틀라나도 받았다. 그는 “점령군이 주민을 돕는 건 국제법상 당연하다”고 말했다.
병사들은 돈을 받은 이들의 개인정보를 묻고 적어갔는데, 그 이유는 몇 주 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군 점령지의 러시아 영토 합병을 묻는 주민투표를 하겠다고 밝혔을 때 분명해졌다. 찬성 투표를 했다고 말하는 주민은 아무도 없다. 병사들이 돈 받은 이들을 찬성 투표자로 기록해 간 것 같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할리나는 병사들이 문을 두드릴 때 울기 시작했다. 그는 “찬성 투표는 군에 간 아들을 배신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투표를 거부하면 병사들이 날 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두려웠다”고 말했다. 남편이 나서 “왜 군인들이 투표 관리를 하느냐”고 따지자 병사들은 그냥 돌아갔다. 며칠 뒤 푸틴은 셰프첸키프카를 포함한 점령지가 러시아 영토에 통합됐다고 발표했다.
그러고 또 며칠 뒤 러시아군은 물러갔고 우크라이나군이 진군해 들어왔다. 할리나는 테티아나에게 달려가며 “우리편이 오고 있다”고 외쳤다. 우크라이나군은 오자마자 러시아군 치하에서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묻고 다녔다. 러시아군에 협력한 부역자를 찾는 우크라이나군에 나디아가 올리아의 집을 가르켜주었다. 올리아의 남편이 조사받고 이틀 만에 풀려나자, 나디아는 충격을 받았다. 나디아는 “올리아 남편의 고자질로 우리 아들이 잡혀가 고문받거나 죽을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냥 풀어주느냐”고 말했다.
마을사람들은 올리아와 스베틀라나와 같이 러시아군에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는 주민과는 말도 섞으려고 하지 않는다. 스베틀라나는 “사람들이 신경이 곤두서 있다. 어디서든 적을 찾아내려고 한다”고 말했고, 올리아는 “친구가 친구를 적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마을이 언젠가 과거처럼 일상으로 되돌아가길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길 건너편 사람들 생각은 다르다. 어느 날 오후 할리나는 테티아나 집에 직접 만든 팬케이크와 크림을 들고 찾아갔다. 할리나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음식을 나누며 러시아군 점령시기를 회고하다가 “나는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테티아나는 “그러면 네 마음도 평생 괴로울 것”이라고 달랜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민주주의 국가서 이런 일이…” 언론계 현직도 원로도 ‘경악’
- 언론사 비용 내고 타는 전용기, 사적 재산인양 제멋대로 배제
- [단독] 국힘 초선 이용, 주호영 공개 저격…“정부 뒷받침도 못 하고”
- 한밤 중 울린 벨소리, 이어진 침묵…스토킹 범죄일까?
- <한겨레>는 이번 취재에 대통령 전용기를 거부합니다
- 미 물가 9개월 만에 최소폭 상승…금리 인상 속도조절 기대
- 용산소방서장 “트라우마 치료…입건 뒤 시민 격려전화 많아”
- 한국이 일본 포도 ‘루비로망’ 훔쳤다?…“어이없어, 항의는 중국에”
- ‘눈 떠보니 후진국’
- “몇몇 목사, 전광훈에 자기 욕망 투사…타락 주범은 결국 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