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덕의 귀농연습] 이주노동자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이재덕 기자 2022. 11. 1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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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에서 1만평의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는 요새 ‘부사’ 수확에 정신이 없다. 며칠 전부터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해 사과를 따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농사일을 도와주곤 했는데, 그분들이 80대가 돼 일하실 수 없게 됐거든. 사과를 따려면 이주노동자들을 불러야지.” 양파 수확기와 겹치면서 이주노동자 다수가 양파 농가로 가는 바람에 일손 구하는 데 애를 먹긴 했지만, 코로나19로 이주노동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지난해보다는 사정이 나아졌다고 했다.

이재덕 산업부 기자

드는 자리는 표가 나지 않아도 나간 자리는 커보이는 법이다. 정씨는 “코로나19를 계기로 농촌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고 했다. 사과와 양파뿐이랴, 식탁에 올라오는 국내산 먹거리 대부분이 이주노동자 손을 거친다. 강원도 강릉의 안반데기 배추를 싹 거둬들이는 것도, 충남 금산 비닐하우스에서 밤낮 깻잎을 따는 것도, 인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오는 일도, 대규모 돼지 농장에서 매일 먹이 주고 똥 치우는 고역도 모두 이주노동자의 몫이다.

이주노동자 연구활동가인 우춘희씨가 쓴 <깻잎 투쟁기>는 전국의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실상을 다뤘다. 깻잎 농장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쉬며 하루 10시간씩 일을 한다. 하루 15상자를 채우기 위해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가며 매일 깻잎 1만5000장을 딴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한 상자에 4000원씩 떼인다. 이들의 숙소는 농장주가 마련한 허름한 비닐하우스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성폭력의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임금도 받지 못하고 내쫓기는 일도 다반사다. 축사 정화조를 청소하던 이주노동자가 잇달아 질식해 숨지기도 하고,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한파를 견디던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인간적인 접근

농촌에서 수년간 이어져 온 문제지만 과도한 노동시간, 임금체불, 비닐하우스 숙소 등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한 여성 이주노동자는 “당신들 옆에 있는 이주노동자가 사람이란 것을 까먹는 것 같다”고 했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농축산업 등 분야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내년에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를 역대 최대 규모인 11만명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은 나오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려면 그들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권리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임금부터 주거환경 등 모든 분야에서 보호망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정부의 역할이 뒤따라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접근’이다.” 지난달 한국을 찾은 에이미 포프 국제이주기구(IOM) 부사무총장의 말이다. 이주노동자 문제는 ‘인력을 대하는 문제’이기 이전에 ‘사람을 대하는 문제’라는 얘기다.

그들 덕분에 나의 삶도 풍요롭다. 먹거리 얘기만은 아니다. 아이가 다니는 동네 유치원에는 중국인 아이들이 많고, 동네 초등학교 앞에는 얼마 전부터 입학 설명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한국어, 중국어, 몽골어, 베트남어 버전으로 제작돼 걸려 있다. 우리 아이도 내년에 이 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동네에는 음식 맛 좋기로 유명한 베트남 식당들이 두 곳 있고, 몇달 전 문을 닫은 집 앞 족발집도 최근 베트남 사람들이 인수해 쌀국수집으로 꾸몄다.

그들과 더불어 일상이 풍요로워져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에는 베트남인들이 사탕수수를 직접 짜서 음료로 만들어 판다. 지난여름 사탕수수즙을 처음 맛본 아이는 그 가게를 지날 때마다 사탕수수즙을 사달라고 조른다. 아이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중국 옌볜에서 온 조선족 여성이다. 아이는 중국으로 놀러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깻잎 투쟁기>에는 이런 구절이 담겼다.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는 일이다. 이주노동자의 ‘손(노동)’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그들과 나의 삶과 꿈이 우리의 일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재덕 산업부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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