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말에는 힘이 있다

한은형 소설가 2022. 11.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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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있었던 일이다. 강남구청역에서 환승하려고 바삐 걷고 있는 나를 누가 막아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떤 할머니였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선릉역 어떻게 가죠?” ‘가나요?’도 아니고 ‘가요?’도 아닌 ‘가죠?’라고 묻는 저 목소리는 뭘까 싶었다. 심지어 따지는 듯한 신경질적인 말투.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왜 처음 본 그녀에게 혼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지 못했으므로.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무시하자. 저런 사람들에게 성의를 보일 필요가 없다고. 저런 분들에게 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렇다. ‘죄송한데요’라거나 ‘저기요’라고 하지 않고, 어떤 도입부도 없이 저렇게 들이대는 분들에게는 공통된 행동 패턴이 있다. 원하는 대답을 들으면 휙 하니 돌아서서 가버린다. 거의 100퍼센트의 확률로. 그럴 때의 황망한 기분이란.

고맙다는 대답을 듣자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았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든 역사의 안내판을 찾아보든 하면서, 나의 시간과 노력을 상대에게 할애했는데 뜻밖의 결과가 돌아와 그랬을 것이다. 내 선의를 불쾌함으로 되돌려받을 줄 몰랐으니까. 내가 왜 마음이 상해야 하지? 속상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는데 불쾌한 감정이 묻어버린 날들이 있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저런 분들은 무시하는 게 낫겠다고.

그런데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고민이 다시 시작된다. ‘저런 사람은 거르자’라는 경험에 기반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전에 먼저 몸이 반응한다. 나도 모르게 대답하게 된다. 아는 거라면 말이다.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을 정도로 매정하지는 못해서. 그리고 서둘러 지나간다. 내게 예의를 지키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그런 일로 마음 상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이런 일들로부터 감정의 소모를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없을 때다. 확실히 내가 모르는 일인데, 도움을 주고 싶을 때 말이다. 도움을 주고 싶다면 멈춰 서서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자면 노력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순간이 생긴다. 어제가 그랬다. 따지듯이 묻는 그녀의 태도는 의아했지만 잠시 고민했다. 나는 돕고 싶은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결정했다. 노력하지 않기로.

약속 시간에 늦을지도 몰랐고, 나는 상대가 늦는 것보다 내가 늦는 게 더 싫은 사람이라 그렇다. 내가 늦으면서까지 그녀를 도와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매우 짧은, 정말 촌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에 이런 무수한 감정이 지나가는 걸 느끼며 그렇게 결정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도 몰라요.”

사실 내가 죄송할 것은 없었다. ‘죄송하지만’이라고 말해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당신이 ‘죄송하지만’이라고 말을 시작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렇게 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저도 몰라요’라는 말은 너무 퉁명스럽게 들릴 수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미 화가 나 있는 그녀를 자극할 수 있으므로 택한 사족이었다. 자기 보호의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하고 나는 서둘러 가던 길로 갔다.

“쳇.” 등 뒤에서 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분명히. 적개심과 화를 담은 그 목소리는 내 등에 꽂혔다. 선릉역에 어떻게 가느냐고 묻던 그 할머니였다. 뒤돌아서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황상 맞을 것이다. “선릉역 어떻게 가죠?”라고 그녀가 물은 후 내가 “죄송하지만, 저도 몰라요.”라고 하고, 바로 “쳇”으로 이어졌으니까. 꽤 오랜 시간 진행된 듯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 세 문장이 오고 간 시간은 다해서 몇 초가 안 될 것이다.

어제도 이 생각을 하고, 오늘도 이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글로 쓰기에 이르렀다. 생각하고 있다. 말의 엄청난 힘에 대하여. 이게 다 말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말의 힘도 있지만, 부정적인 말의 힘도 있다. 말 한마디가 이토록 강력하다니.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도 말 때문일 때가 많았다. 좋거나 나쁘거나, 신선하거나 진부하거나. 나는 이왕이면 전자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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