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54] ‘이 풍진 세상’에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희망가’는 애초에 노래의 첫 소절을 따서 ‘이 풍진 세상’이라고 하였다. ‘청년경계가’ 또는 ‘탕자자탄가’라는 제목으로도 불렸던 이 노래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후 식민지 조선의 시대 정서와 조응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일본에서 유행한 노래와 달리 ‘이 풍진 세상’은 허무에서 희망으로 이어지는 노랫말로 큰 호응을 얻어 1920년대 초반에 노래책과 음반에 자주 실렸다.
사실 이 노래의 원곡은 서양의 찬송가다. 한때 ‘가든 힘(Garden Hymn)’이라는 선율(tune) 이름 때문에 ‘가든’이 작곡한 노래로 오해받은 적이 있으나 제레미아 잉갈스(Jeremiah Ingalls)가 실제 작곡자다. 1890년에 출판된 일본 창가집에 ‘꿈의 밖(夢の外)’이란 제목으로 수록된 이 노래는, 이후 1910년에 배가 뒤집혀 어린 학생들이 12명이나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해 여학교 음악 교사가 진혼곡으로 선보이면서 ‘시치리가하마의 애가(七里ケ浜の哀歌)’ 또는 ‘새하얀 후지산의 뿌리(真白き富士の根)’라는 제목으로 개사되어 불렸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 이 노래가 널리 유행했고 우리나라에도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 박채선과 이류색 등이 처음 음반에 담을 때는 전통 창법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외래 노래가 어떻게 토착화되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미 성악뿐만 아니라 기악으로도 다양하게 변주된 것을 봐도 당시에 이 노래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이 노래가 추모의 노래로 불린 적이 있다. ‘여학생들의 노래’라는 부제(副題)가 달린 ‘동무의 추억’이 그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노랫말은 영문학자이자 시인으로 알려진 이하윤이 작사했고,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김정구의 누나 김안라가 벨칸토(bel canto)로 노래하여 1936년에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국가와 시대를 넘나들며 노래 한 곡이 오랫동안 위로와 치유의 기능을 하였다.
얼마 전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가 전 국민에게 준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 앞에서 그 어떤 말도 그저 조심스러울 뿐이다. 애도의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멈췄으나 이제 다시 노래가 시작되어야 한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없더라도 누군가에게 분명 위로가 될 수 있으므로. 다정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긴 밤을 구하듯, 따뜻한 노래 한 소절이 누군가의 아픈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으므로. 슬픔을 함께하며 애도의 마음을 담아 ‘동무의 추억’을 보낸다.
<동무의 추억>
너 간 곳이 어드메냐 사랑하는 우리 친구
새 울고 꽃 피는 그 봄은 다시 와
동산에는 나비 날고 시냇물은 흐르건만
가 버린 동무야 무심도 하구나
뜰 앞에서 지는 낙엽 가엾다고 울던 네가
봄 오자 갈 줄야 꿈엔들 꾸었으랴
다시 못 올 그 나라로 우릴 두고 홀로 갔나
피려다 져버린 애처로운 꽃망울
네 무덤을 찾아오니 잔디 더욱 푸르구나
가을이 설어서 달을 보며 울던 너
찬 눈 덮인 이 속에서 한겨울을 지냈는가
너 잃은 우리들 헤어지는 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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