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등뼈 지고 살아온 7살 아이, ‘4·3 고통’ 처음으로 꺼내다
“천지신명은 아실까?/ 천둥번개 치던 밤/ 할아버지 찾아다니다/ 할머니에게 업힌 채/ 깔려 곤두박질친 것을/ 천지신명은 아실까?/ 없어진 할아버지는/ 그날 솔숲에서/ 누군가의 손에 돌아가신 것을/ 산이며 들로 뛰고 뒹굴던 아이가/ 그 밤 한 번의 곤두박질로/ 평생 굽은 등으로 힘겹게 살고 있다는 것을/ 천지신명은 아시리라.”(천지신명은 아실까?)
제주시에 살고 있는 강양자(80)씨의 삶은 그 날 멈췄다. ‘4·3’이 한창이던 1948년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 치는 캄캄한 어느 밤, 집에 돌아오지 않는 외할아버지를 찾으로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나갔던 손녀는 미끄러지면서 돌무더기에 깔려 등을 다쳤다. 그 돌무더기가 평생을 덮칠 줄을 몰랐다. 7살 아이의 다친 등에는 자라면서 콩알만한 등뼈가 조금씩 튀어나오기 시작하더니 모든 꿈을 앗아갔다. 그렇게 세상을 외면했던 그가 글과 그림을 통해 자전적 에세이 <인동꽃 아이>(도서출판 한그루)를 내고 세상과 소통에 나섰다.
10일 오후 제주4·3트라우마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여는 감씨를 8일 미리 만났다. 내년 1월 31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는 그가 그린 어린 시절의 풍경과 삶에 대한 기록을 담은 글과 그림 21점을 선보인다.
제주 외가에 살던 7살 때 ‘4·3’ 겪어
외조부모·외삼촌 모두 토벌에 희생
“외할머니 업혔다가 등 다쳐”
2005년 후유장애 신청했으나 ‘불인정’
“할 줄 아는 것 한 가지쯤 있었으면”
‘인동꽃 아이’ 출판기념회…그림전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강씨는 해방 직후 부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자 부모는 일본으로 다시 떠났고 어린 딸은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외가에 맡겨졌다. 반딧불이를 ‘땅의 별’이라며 따서 방 안에 갖다놓기도 했던 그 아이는 벚꽃 복숭아꽃이 핀 강가에 살았던 오사카 시절과 4·3 이전의 생활이 가장 평화로웠다고 기억한다. 외갓집 연못가에서 배 타고 일본에 있는 엄마 아빠한테 간다며 댓잎으로 배를 엮어 물 위에 띄우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4·3은 강씨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중산간마을이었던 광령리 집에서 토벌대에 끌려간 외할아버지는 주검으로 돌아왔고, 마을 소개령에 따라 해안마을로 끌려갔던 외할머니와 외삼촌마저 1949년 1월 지서에서 희생당해 외가 가족이 전멸했다. 외갓집은 토벌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면서 사라졌다. 그렇게 강씨의 행복했던 유년시절은 사라졌다.
이후 그는 친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자랐지만, 4·3 때 다친 등은 고통스러웠다. 다친 그날 이후 한달여 정도 누워있다가 깨어났고, 그 뒤 등뼈가 조금씩 돌출되다가 지금은 심하게 휘었다.
최근 4·3 희생자에 대한 국가보상금 지급이 시작되고, 입 밖에 내지 못했던 4·3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 시대가 됐지만, 강씨는 여전히 그늘 속에 있다. ‘4·3 후유장애’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씨는 2004년 4·3위원회에 후유장애 희생자 신고서를 제출했으나 2005년 “3살의 어린 나이에는 발생하지 않는 질병으로 판단돼 4·3으로 인한 부상으로 인정할 수 없어 희생자로 볼 수 없다”며 거부됐다. 강씨는 주민등록상 1945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42년생이다.
“재심을 신청하고, 행정소송을 제기해 서울행정법원까지 갔지만 인정되지 않았어요.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마치 거짓으로 주장한 것처럼 판결이 난 것을 보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큰 좌절을 당한 강씨는 새삼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다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글과 그림을 시작하면서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나의 삶은 과거도 현재도 4·3의 상처로 고통은 끝 간 데를 모른다. 나를 송두리째, 마음도 몸도 뒤바꿔 놓았을 뿐 아니라, 내게서 외가 가족 모두를 앗아가 바렸다. 나에게 4·3은 아직 잠들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평화로웠던 유년의 풍경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고,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글로 썼다. 할미꽃처럼 고개를 숙여 살았던 강씨가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려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엉겅퀴도 풀꽃들도/ 흰나비며 호랑나비/ 동무가 있는데/ 산담의 할미꽃/ 홀로 앉아 있구나/ 지나는 바람이 슬쩍/ 보슬보슬/ 솜털을 건드릴 뿐/ 어려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근심 걱정 있어서/ 고개를 푹 숙였나.”(할미꽃)
글을 쓰면서 몸과 정신을 점차 회복되자 그는 어릴 때 겪었던 ‘4·3’이 생각났다. “아이가 살았던 산촌 집은 불탔네/ 검붉은 연기 담장을 넘나들고,/ 대나무 딱총처럼 따닥딱 따따닥/ 터지는 소리/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소꿉놀이하던 나무 솥단지/ 바구니도 다 타버렸네/ 왜 불을 질렀을까 온 마을 전체를/ 아이는 속상하고 분한 마음뿐”(유년의 기억)
책을 만드는 데는 여러 사람이 거들었다. 강씨의 글을 다듬고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고 후원과 크라우드펀딩 기금으로 출판을 했다. 강씨는 “책을 포장한 상자가 배달되니 너무나 감격스럽고 놀라서 한동안 책을 꺼내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며 “도움을 주신 여러 분들에게 고맙다”고 전했다.
그런 강씨의 소원이 있다. “사람답게, 나답게, 한 여인으로, 할 줄 아는 것 한 가지쯤 있는 여자로 이 세상을 살고 싶다.”(나의 소망)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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