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현장의 기적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란다 [정명원 검사의 소소한 생각]

2022. 11. 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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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7년 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
그래픽=김대훈기자
잇단 사고로 사회안전망에 대한 의구심
광산 노동자 생환 소식마저 무겁게 들려
기적과 즉흥 대신 시스템이 작동해야

슬픔에 대해 쓰지 않고 이 계절을 지나갈 수 없다. 국가가 서둘러 선포한 애도기간이 아니더라도 빽빽하게 내려앉은 슬픔을 피할 길 없다. 일상의 출퇴근길에서 무표정하게 서로의 밀집을 견디며, 누군가의 오열이 터지는 TV 화면 아래 서둘러 국밥을 삼키며 묵묵히 슬프다. 슬프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슬픈가 묻는다. 이 와중에 슬픔의 연유를 따져 묻는 이유는 그것만이 이 막막한 슬픔의 계절을 제대로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지난 주말 이태원에서 벌어진 일이 방송을 타고 전해졌을 때 우리는 모두 크게 놀랐다. 놀란 눈을 크게 뜬 모두의 일성은 '어떻게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였다. 말을 뱉어 놓고서야 우리는 우리나라가 꽤나 안전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계 최고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공고한 사회 안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확신, 언제 어디고 상식선의 안전과 질서가 지켜질 것이라는 신뢰, 위험에 처한 개인은 국가가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언제 합의한 적 없는데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확신들이 참담히 무너졌다. 우리가 알던, 안다고 생각했던 사회 수준이 상상할 수 없이 비극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안도하고 살았던 날들, 은근히 자부심마저 가졌던 날들이 부끄러움이 되어 터진 살갗 위로 소금처럼 뿌려졌다. 쉽사리 안도하고 잠들었던 자들의 죄책감이 빈틈없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하여 그 밤, 우리 각자는 모두 무언가를 잃었다.

이태원 참사 뉴스가 세상을 뒤덮을 무렵, 봉화의 아연광산 190m 갱도 안에는 두 명의 노동자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채 갇혀 있었다. 해당 광산은 지난 8월에도 붕괴사고가 나 1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곳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탄광촌에서 들었던 흉흉한 소문 같은 뉴스를 보며 이것이 2022년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에 아연한 한편, 무사생환을 기다리는 마음이 애가 탔다. 그리고 마침내 221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광부들은 살아 돌아왔다. 커피믹스를 녹여 먹으며 버텼다는 일화와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았던 불굴의 의지에 대한 찬사가 아픈 계절 위로 유일한 희소식처럼 전해졌다.

광산 노동자들의 생환이 더없이 반가우면서도, 한구석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그들의 생환이 '기적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평시에는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뜻한다. 우리의 노동환경과 안전 구조 시스템으로는 수백m 땅속에 노동자가 갇히는 일을 막을 수 없고 열흘이 지나도록 구조되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결국 그리 되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으나 경험이 많은 광부의 노련함과 불굴의 의지 덕분에 기적적으로 구조될 수 있었다는 스토리는 감동적이지만 슬프다. 기적이 아니라도 당연히 구조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시스템, 언제고 무너지고 갇힐 위험이 있는 환경 속으로 노동자를 밀어 넣지는 않을 것이라는 합의가 기적보다 간절히 요구된다.

이태원 참사로 세상이 발칵 뒤집힌 다음에야 도지사, 국회의원들이 광산 붕괴 사고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우연일까. 그다음에야 많은 장비들과 전문가들이 줄줄이 투입되고, 발견치 못했던 접근로를 발견하게 된 것은 천운일까. 지금이라도 이렇게 지원이 오니 다행이라고, 그런데 관심이 언제 사라질지도 몰라 걱정이라고 8일째 현장을 지키던 광부의 아들은 말했다. 쉽사리 안도할 수 없는 시대의 민낯을 아는 자의 목소리였다. 이제 우리도 안다. 알게 되었으므로 더는 뜬 눈을 감지 않을 일이다.

정명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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