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추억의 기록들, 남북 경계 없었던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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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당시 큰 혜택으로 10월에 기사 많이 실려 남북 학생들 지금과 달리 자유롭게 한반도 왕래 일본·중국 등 여러 외국 둘러보며 견문 넓히기도
이태원 참사로 젊은 생명들이 허무하게 희생됐다. 그 사이 남북한은 미사일을 주고받았다. 100년 전 우리 민족의 희망이었던 젊은 학생들은 어떻게 지냈었을까? 남과 북을 스스럼없이 오가며 수학여행을 떠났던 그 모습을 찾아 100년 전으로 떠나보자.
100년 전 10월 기사를 보면 학생들의 수학여행 모습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당시 수학여행은 큰 혜택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여행 하기가 어려웠었다. 학생들은 한반도의 여러 곳, 게다가 외국의 여러 곳까지 둘러보면서 견문을 넓혔다. 수학여행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열차였다. 대량운송이 가능한 교통수단이 생기면서 단체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경성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 35명은 지난 8일 수학 여행하기 위하여 경주에 도착하여 고적을 견학하고 10일 출발했다."(1923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약 100명은 동교 교원 김형배(金亨培)외 3명의 인솔하에, 일행은 지난 12일 논산에 와서 지난 13일 은진 관촉사 미륵을 관람한 후, 고석(古昔; 오랜 옛날) 백제의 왕도(王都)되는 부여읍을 향하여 출발하여, 부여팔경(扶餘八景)을 관람하고, 14일 계룡산을 향하여 계룡산의 고적(古跡)을 완람(玩覽; 경치를 보고 즐김)한 후, 15일 오후 귀경(歸京)할 예정이라더라."(1920년 10월 17일자 매일신보)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는 우리 조상 단군(檀君)의 고향 되는 서선(西鮮; 황해도·평안도 등 조선 서쪽 지방) 고적 중 유명한 영변, 묘향산, 약산, 동대, 보현사, 기린굴 등 명승(名勝)을 관람하고자, 교사 이기용(李基用)씨 인솔하에 학생 13명 일행이 11월 5일에 학교를 출발하여 여행할 때, 행로에 기문(奇聞; 이상한 이야기)이 있으면 곧 노트를 꺼내어 일일이 기재하는 탐승(探勝)을 필(畢; 마치다)하고 귀교한 후, 감상을 피력(披瀝)한다더라."(1920년 11월 11일자 매일신보), "경성 선린상업학교 3학년 학생 33명은 지난 11일 밤 평양에 와서 다음 날 12일 평양 시가와 모란봉, 기자림(箕子林) 기타 명승고적을 탐방하고, 동일 오후 차로 진남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더라."(1922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
당시의 수학여행 기사를 보면, 지금과 달리 남쪽과 북쪽의 학생들이 서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수학여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모습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수원농전(水原農專) 여행'이라는 제목의 1920년 10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수원농림전문학교 생도 약 40명은 두 무리로 나눠 함흥과 신의주 방면에 수학여행을 할 터인데, 함흥팀은 10월 11일 아침 수원을 출발하여 원산, 함흥, 석왕사를 경유하여 동일 귀교하였으며, 신의주팀은 11일 수원을 출발하여 신의주에 직행하여 차제(次第; 이어서) 평양, 진남포, 승호리, 겸이포, 개성의 각지를 시찰하고 17일 귀교할 예정이라더라."
1921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도 남쪽 학생들이 북쪽으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난 30일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 전부와 교원 약간 명이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차비는 한 사람 앞에 74전씩과 점심 도시락을 다 각기 준비해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곤한 잠을 깨우지 못하는 오전 4시라는 이른 아침부터 남대문 정거장으로 모여서 서로 손에 손을 잡고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오전 5시 10분 열차로 남대문을 떠나 목적지 되는 개성에 이르러, 종일 유쾌하게 놀고 오후 5시에 일행은 다시 기차에 몸을 실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더라."
북쪽의 학생들 또한 남쪽으로 여행을 왔다. 1921년 9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의주농교생 여행'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의주공립농업학교 제2학년 생도 13명은 지난 18일부터 약 9일간 예정으로 평양, 고성, 경성, 인천, 수원 지방에 수학여행 차로 출발하였다더라." 1922년 6월 1일자 매일신보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려 있다. "개성군 송도고등보통학교 3학년 생도 60여명은 수학 여행하기 위하여 고적(古蹟)이 최다(最多)한 충청도 부여, 강경, 논산, 군산 이외 계룡산 일원을 열람(閱覽)하고, 5월 28일 오전 0시에 귀교하였더라."
당시의 수학여행은 한반도를 벗어나 외국으로도 많이 갔었다. 주로 일본과 중국이었다. 그 수학여행을 따라가 보자. 1920년 10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경성의학전문학교 일본 여행' 기사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직원 2명과 생도 18명은 22일 아침, 남대문을 출발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시작하여, 후쿠오카(福岡)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도쿄(東京) 닛코(日光) 등 각 명승지를 역람(歷覽;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구경함)한다는데, 귀교(歸校)는 다음 달 11일경 예정한다더라."
1921년 10월 1일자 매일신보는 제주도 학생들의 일본 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제주 공립 학업학교에서는 학식을 증진키 위하여 일본 큐슈(九州) 지방의 수학여행을 목적하고, 동 학교 2년생 중 품행이 우수한 김홍삼(金洪三), 강인갑(康仁甲), 이달춘(李達春), 송희팔(宋禧八), 송문평(宋文平), 송자경(宋自卿), 이기휴(李基休), 김종훈(金宗勳), 이갑출(李甲出), 김완진(金完珍) 등을 선발하여, 이치노미야(一宮) 교유(敎諭; 교원)의 인솔하에, 10월 23일 오전 12시 부산 출발로 동상(東上; 동경에 올라감)의 길에 올랐는데, 왕복은 약 2주일간이라더라."
남과 북의 경계도 없이 자유로이 수학여행을 다니던 곳을 이제는 가 볼 수가 없다. 가 볼 수 있다는 기약도 없다. 대신 미사일과 서로를 향한 욕설(辱說)과 억지만이 난무(亂舞)하다. 100년 전 수학여행을 통해 평양과 경성을 오가셨던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어머니께서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까. 문득 '천지만엽출우일본'(千枝萬葉出于一本)이란 말이 떠오른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많다 해도 그 모두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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