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의 新무궁화고] 무궁화 진 자리에 광복은 피어났다
[김영만의 新무궁화고] (7) 무궁화 진 자리에 광복은 피어났다
“몽고 사막 내부는 차디찬 바람/ 사정없이 살점을 떼갈 듯한데/ 삼림(森林) 속에 눈 깔고 누워 잘 때에/ 끓은 피가 더욱이 뜨거워진다/ (중략) 부모형제 처자를 이별하고서/ 십여 년을 이같이 생활하다가/ 무궁화가 봄 만나 다시 필 때에/ 우리 즐거움 따라서 무궁하리라“ (<독립신문>(1922년 10월21일)에 실린 독립군가 <독립군(獨立軍)>)
100년 전, 항일전장의 최일선에서 무장투쟁하던 독립군들에게 노래는 또 하나의 무기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 같이 모인 장소에서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고, 노래 마디마디에 무궁화를 심어나갔다.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군가 속에 뿌리 내린 무궁화는 분명 그들의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가족과 고향, 나아가 조국을 상기시키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고귀한 이들이 산화한 지금, 한겨레의 위대한 영웅들이 끝내 한 인간으로 노래했던 군가와 시가를 중심으로 한 기록들에서 무궁화에 담긴 또 다른 상징화 양상을 들여다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대 정체성의 상징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자료집 10>에는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중학교의 영내 내무 생활(1913∼1915년 추정)이 교관 원병상의 수기에 소개돼 있다. 당시 전교 생도반장이었던 그는 “나팔 소리에 조례가 엄숙하게 시작된다. 조례식에는 교직원 전원이 배석하고 점명(點名)을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에서 출석 확인(點名) 후 교육생들이 불렀던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후렴구가 나타났다.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대 ‘한국광복군’과 관련하여 임시정부 선전부장 등을 역임한 엄항섭이 창설 당일의 현장 상황을 소개한 기록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배관기(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拜觀記)>에는 “왜적이 무궁화동산을 짓밟은 지도, 이제 삼십년이지만, 신대한의 싹은, 수십만 선열의 피 가운데서 뭉게뭉게 자라난 것이다”라는 언급이 남아 있다. 한국광복군 창설의 의미를 새기며 선열들의 피로 만들어진 항일투쟁 성과를 나열하는 글에 무궁화가 우리나라로 표현됐다.
한국광복군 창설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는 ‘육군 군인표식 제정안’(1945년 1월9일)과 ‘육군 제복양식 제정안’(1945년 2월19일)을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공포ㆍ시행(<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8>)했다. 이후 광복군은 독자적인 군복을 착용하게 됐으며, 당시 장교용 모표의 상단을 살펴보면 별과 태극으로, 하단은 무궁화로 구성됐다.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군이라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장으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료다.
한국광복군의 군가
1942년 11월4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은 <국가 및 군가 제정안>을 통과시킨 뒤, 이어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에서 <광복군가집 제1집>을 발간(1943년)했다. 수록된 16곡의 광복군가 가운데 3작품의 노랫말에 ‘무궁화’가 삽입되었다. <광복군 석탄가>의 경우, “사꾸라가 떨어져 태평양 속으로 묻히고/ 무궁화가 피어서 우주에 향기를 피운다/ 에헤야데헤야 에헤야 혁명의 불길이 타오른다” 구절이 발견되고, <앞으로 행진곡>에서는 “장하도다 한배님 아들딸들은 배달겨레며 백두산 동해물과 한반도는 우리집일세/ 반만년의 역사는 밝고 밝은 한 빛 되며 찬란한 문화는 무궁화 향기로세”라는 문구가 확인된다.
이외 광복군 군가로 추정되는 <광복군 돌진가>의 가사 “싸우자 철벽 같은 광복군아/ 대한 남아가 무궁화되어/ 아름답게 만발할 날 돌아왔도다/ 무궁화 만발했네 삼천리 강산/ 대한 우리나라 만세곡곡에”(독립군시가집편찬위원회, <독립군시가집 배달의 맥박>)에도 무궁화의 자취가 남아 있다.
항일 시가와 독립군 군가에 등장하는 무궁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 외의 독립군과 주변 근거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가창한 군가와 시가에서도 무궁화와 관련한 기록이 발견된다.
3ㆍ1운동 1주년이었던 1920년 3월1일 <독립신문>에 게재된 <삼월 일일>에는 “이 피를 뿌릴 때 영광의 무궁화/ 다시 피리라/ 그리운 조국강산/ 환희에 차리라/ 환희에 차리라”는 시문이 실렸다. 일제의 칼과 총탄에 쓰러진 영령들을 위로하며 독립의 결의를 다진 이 시가에서 무궁화는 조국ㆍ독립ㆍ광복의 상징이었다.
1922년 10월30일 <독립신문>에 수록된 <우리의 신세>에는 “먹을 거 없는 자여! 찬 아침 공기에 마비될 적에 쓰리고 주린 배 움키어 잡어라 그리고 봄빛에 따듯한 무궁화동산을 생각하여라”는 구절이 전해진다. 땅과 집, 그리고 옷과 먹을 것조차 없는 처지지만 고국 광복을 떠올리며 민족을 독려했던 이 시가에서 무궁화는 금수강산ㆍ고국ㆍ조국산천과 함께 ‘광복’의 다른 말이었다.
1920년대 상하이와 만주 독립지사들이 부른 노래로 추정되는 <애국지사의 노래>를 들여다보면 “의분과 인내 속에 강은 더 흘러/ 내일의 기쁜 날을 맞이하려는/ 자유와 독립의 힘찬 종소리/ 무궁화 삼천리에 울려퍼지리”(<독립군시가집 배달의 맥박>)라는 가사가 확인된다.
아울러 <항일전선가>라는 제목으로도 통용되는 군가 <통일전선가>에서 “소화궁의 황금탑에 폭탄 던지고/ 삼천리에 독립기를 펄펄 날리세/ 수십 년을 짓밟힌 반도 강산을/ 무궁화의 낙원으로 만들어보자”(연세국학총서73 <항일가요 및 기타>)라는 노랫말이 등장한다. 1920년대 무렵 독립군들의 이상향으로 그려졌던 무궁화의 의미가 드러나는 가사다. 이 외에도 독립군이 불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군가ㆍ시가 가운데 50곡이 넘는 작품에서 무궁화가 나타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부른 노래 속 무궁화
투쟁의 현장에서 군가와 시가는 독립군의 사기를 진작하고 위로했다. 이런 배경에서 군가ㆍ시가 속 무궁화는 ‘우리나라’와 ‘독립ㆍ광복’을 상징하며 깊은 이면에 ‘고향’과 ‘가족’을 가리켰다. 형언할 수 없는 극한 상황과 생사의 갈림길에서 독립군이 느꼈던 그리움을 무궁화가 헤아렸던 것일까.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떠올렸을 무궁화는 그렇게 광복의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김영만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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