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DS 예방법 제19조 헌재가 고민하는 이유

서보경 입력 2022. 11. 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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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되었다. 오는 11월10일 헌법재판소에서 이에 대한 공개 변론이 이루어진다.
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뭐 어때요, 괜찮아요. 지금 이런 거 병도 아니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사세요(한국HIV낙인지표조사 2018, 31쪽).” 나는 이 말을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이 설계한 낙인지표조사라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전해 들었다. 한국의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인들이 어떤 종류와 강도의 차별과 낙인을 경험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이 연구에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여 자신의 경험을 전해주었다.

심층 인터뷰에 응해준 한 분은 감염 사실을 알게 된 후 병원에 갈 때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위의 말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의사가 담담한 어조로 전해준 이 몇 마디에는 HIV 감염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다. HIV 감염은 더 이상 위중한 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HIV에 감염되었어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HIV 의학의 발전은 이처럼 좋은 삶을 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HIV 감염은 아직도 좋은 삶을 살기 어렵게 만든다. HIV를 여전히 ‘위험한’ 질병으로 바라보는 사회와 법의 인식 때문이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이하 예방법)’ 제19조에 규정된 ‘전파매개행위의 금지’, 즉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와 같은 조항이 대표적이다. 이 한 줄의 문장은 한국 사회에서 감염을 일종의 범죄로 여기게 하는 데 크나큰 기여를 해왔다. 현재의 예방법은 HIV에 감염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반드시 법의 구속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만든다. 법이 감염인을 공중보건의 위험인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 법은 의미가 모호하면서도 규제의 정도가 지나치다. HIV에 감염된 사람은 왜, 도대체, 무얼 하지 말라는 것일까? 혈액 또는 체액? 체액의 종류만 해도 여러 가지다. 정액과 질액, 눈물과 땀 중 도대체 내 몸의 무엇을 가지고, 타인에게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일까? 이 조항이 만약 성관계에 관한 규정이라면, 가장 사적인 영역에서 체액의 교환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법은 정말 규율할 수 있는 것일까?

2019년 해당 조항의 위반에 관련된 사건을 다루던 서울서부지법 재판부 역시 비슷한 질문에 도달했다. 판결을 내리기 전에 이 불명확하고 비현실적인 금지 조항이 과연 헌법에 합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먼저 판단해달라고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는 11월10일 마침내 헌법재판소에서 이에 대한 공개 변론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현재 남아 있는 법 조항은 사실 반쪽짜리다. 1987년 처음 제정된 예방법 제19조 ‘전파매개행위의 금지’ 조항은 HIV 감염인이 ‘대통령령이 정하는 감염의 예방조치 없이 행하는 성행위’나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타인에게 전파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다. 즉, 해당 법은 한국에서 오직 HIV 감염인에 한하여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성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 법의 제정 당시부터 현재까지도 한국에서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성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의로, 혹은 강요로 인해, 흔히 하거나, 할 수밖에 없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HIV 감염인만이 상대와의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성행위를 했다고 고발될 경우 벌금형 없이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 조항의 문제점은 총 36개 시민단체가 모여 예방법 개정 운동을 벌인 2006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이 조항이 예방에 기여하지 않으며, 실제 전파가 일어났는지와 관계없이 과도한 형사처벌을 가한다고 지적하면서 법 개정을 권고한 바 있다. 2008년 ‘대통령령이 정하는 감염의 예방 조치 없이 행하는 성행위’라는 내용이 제19조에서 삭제되었고, 현재의 내용(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개정 이후에도 전파매개행위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

치료받고 있는 감염인은 타인을 감염시킬 수 없다. 이는 HIV 의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다. ‘전파매개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은 바로 이 의학적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부터 심각한 위해를 야기한다. 한번 감염된 사람은 언제든 타인에게 HIV를 옮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을 법으로서 정당화해온 것이다.

HIV 의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HIV 감염인이 효과적인 항바이러스제 치료를 받고 있는 경우, 질 혹은 항문 성교로 인한 HIV 전파 위험은 무시할 만하거나 전혀 없다(Expert Consensus Statement on the Science of HIV in the Context of Criminal Law, 2018). 이것은 지난 40년간의 HIV 예방과 치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발견이자, 전 세계 HIV 연구와 치료 분야의 전문가들이 도달한 과학적 합의다. 효과적인 치료는 체내에서 바이러스의 활동을 무력화한다.

현재의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은 위험이 없는 곳에서 처벌을 공언한다. 이 법은 그 누구도 보호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실질적인 전파의 위험을 야기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의도적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이 법은 치료받고 있는 감염인에게 불필요한 두려움과 수치심을 자극하고, 그리하여 사람다움을 이루는 중요한 영역인 성적 욕망과 실천을 제약한다.

성관계로 인해 언제든 협박과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감염 여부를 상대에게 알리는 것은 엄청나게 두렵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응급 상황에서 누구도 나를 치료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만큼, 내가 욕망하는 상대로부터 언제든 거부되고 고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삶의 기반을 부서트린다. 이 법이 감염인의 행위 일부만을 규제할 뿐, 인격권 전체를 침해하지는 않는다는 논리가 크게 어긋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적 자율성은 인간 존엄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받지 않고 상호 합의 아래 성관계할 자유는 평등해야 한다. 거기에 대한 인정 없이 평등한 존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은 HIV 감염인뿐 아니라 모든 시민의 삶을 통제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설사 법이 실질적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질병 통제가 목적이라면 개별 시민의 행동반경과 일상을 언제든 제약할 수 있다는 기조를 형성하는 데 오랫동안 기여해왔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기점으로 감염병 전파 행위에 대한 가중처벌과 예방조치 위반의 사법적 대응이 더욱 강화되었다. 개인의 어떤 행동이 어떤 종류의 위험과 손해를 공동체에 야기하는지 실질적으로 따져보기도 전에 국가는 ‘감염병의 전파를 매개하여서는 안 된다’는 무조건적인 의무를 시민에게 먼저 부여했다. 그리고 자의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을 휘둘렀다.

이번 예방법 제19조 위헌 제청은 중요한 기회다. 해당 조항의 위헌성을 따져보는 과정은 이 법을 통해 축적된 낙인의 역사를 되짚고, 낙인찍힌 사람의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질병 자체와 질병 낙인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줄여야 예방과 치료를 가로막는 장벽을 부술 수 있다. 감염 이후의 삶 역시 가치 있는 삶이라는 점을,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누릴 자격이 모두에게 있음을 공적으로 확인할 때, 낙인은 마침내 힘을 잃는다.

서보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부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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