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 한국사에 ‘자유민주주의’ 명기…연구진, 철회 요구
교육부가 2015년 이후 처음으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을 전면 개정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표현을 추가하고 성 소수자 관련 표현을 삭제했다. 디지털 전환과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도입에 따라 초·중·고 교육 방향은 물론 교과목과 교과서를 크게 바꾸면서, 일부 표현으로 인해 불필요한 이념 논쟁이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교육부는 9일 초·중등학교 및 특수교육 교육과정(2022 개정교육과정) 행정예고안을 공개하고, 행정예고 기간인 이날부터 오는 29일까지 국민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행정예고안은 다음달 초 국가교육위원회의의 심의·의결을 거친 뒤, 올해 안에 교육부 장관이 확정·고시한다. 2022 개정교육과정은 2024년부터 초 1~2학년에, 2025년부터 초 3~4학년 및 중 1·고1에, 2026년부터 초 5~6학년 및 중2·고2에, 2027년부터는 중3·고3에 연차적으로 적용된다. 특히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고등학교는 ‘공통과목+일반·진로 선택과목' 체제에서 ‘공통과목+일반·진로·융합선택과목'으로 바뀌어 학생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심화 과목을 배우는 변화가 예상된다.
이런 큰 틀의 변화 이외에 역사 교육과정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추가로 반영돼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고등학교 한국사 성취기준(수업과 평가에 필요한 근거와 기준)에 나온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이라는 기존 표현을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으로 바꿨다. 성취기준 해설에 나온 ‘민주화에 기반해 평화적 정권교체가 정착되고’라는 표현도 ‘민주화에 기반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정착되고’라는 표현으로 수정됐다. 중학교 역사 성취기준 해설에서도 ‘사회 전반의 민주적 변화 과제’라는 표현이 ‘사회 전반에 걸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정착 과정과 과제’로 바뀌었다. 다만,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의 성취기준 해설 부분에 적힌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표현처럼 자유민주주의보다 민주주의가 맥락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기존 표현을 유지했다.
앞서, 지난 8월30일 2022 개정교육과정 시안이 처음 공개된 직후, 보수언론과 국민참여소통채널 등을 중심으로 시안에 ‘6·25 남침’과 ‘자유민주주의’ 표현이 빠져있다며 학생들이 좌편향된 교과서로 공부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역사 교육과정 속 민주주의 관련 표현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쟁점화된 문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 체제에 맞서는 대립 개념으로 차용된 탓에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꿀 경우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 미화에 악용될 수 있고 민주주의 개념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협소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면 ‘인민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와 구분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약 한달 뒤인 9월30일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시안 공청회에서 ‘6·25 남침 표현’이 추가된 절충안이 공개됐는데, 행정예고안에서는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반영하라는 요구까지 받아들여진 것이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은 “고등학교 한국사와 중학교 역사에 자유의 가치를 반영한 자유민주주의 용어 수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속해서 제기됐다”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명시된 헌법 전문, 헌법재판소 결정문, 법률, 역대 교육과정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 고등학교 통합사회의 경우, 기존에 ‘사회적 소수자’의 사례로 ‘장애인, 이주 외국인, 성 소수자 등’을 들었던 것을 ‘성별·연령·인종·국적·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 구성원’으로 바꿨다. 초등통합·체육·음악·미술 등 교과의 경우, 이태원 참사 이후 학교에서의 안전교육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감안해 다중 밀집 환경의 안전수칙을 포함해 위기상황 대처 능력을 함양하도록 교육과정을 개선한다. 교육과정 총론에 생태전환교육과 노동교육을 명시해달라는 요구도 나왔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다만 생태전환교육과 관련해선 ‘기후생태환경변화 등에 따른 미래사회의 불확실성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표현이 추가됐다.
“이주호 시즌1 때와 판박이”…교육부 ‘자유민주주의’ 명시에 학자들 반발
교육부가 ‘자유민주주의’ 표현이 추가된 2022 개정교육과정 행정예고안을 발표하자, 역사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한 연구진들이 연구 독립성 훼손이라고 반발하고, 개정 교육과정을 심의하는 교육과정심의회에서도 행정예고안에 반대하는 의견이 표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2022 역사과 교육과정 개발 연구진 일동’은 9일 오후 성명을 내고 “교육부는 연구진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수정한 행정예고안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교육부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기하는 데 집착함으로써, 민주주의와 관련된 다양한 보편적 가치를 담고자 한 연구진의 의도를 왜곡했다”며 “동시에 민주주의가 내포하는 다양성과 포용적 가치를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또 “이는 연구진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전제로 교육부 담당자와의 협의를 통해 교육과정을 개발해 온 과정을 일거에 무시한 행태”라며 “교육부는 연구진이 제출한 행정예고본 원안을 존중하고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2022 역사과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한 연구진들은 ‘민주주의’라는 표현에는 다양한 함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비교적 협소한 의미인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추가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교육부는 연구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으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으며 개정교육과정 고시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교육부에 있다는 입장이다. 오승걸 교육부 학교혁신지원실장은 “연구진의 전문성과 자율성은 최대한 보장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도 “교육과정을 고시할 때 그 권한은 교육부 장관에게 있으며 연구진이 연구하는 것을 그대로 교육과정에 고시하는 게 아니다. 국민 의견 수렴과 여러 심의 과정을 거친 뒤에 행정예고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교육부 산하 법정 기구인 교육과정심의회의에서조차 이견이 나왔으나, 행정예고안에 대한 심의회 차원의 표결 없이 해당 안이 그대로 발표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직 교사인 정성식 심의회 운영위원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난 7일 교육과정심의회 회의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끼워넣는 행정예고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총론 교육과정에 ‘생태전환교육’과 ‘노동교육’을 명시하는 내용 등을 담아 수정안도 제출했다”고 밝혔다. 교육부 관계자는 “해당 위원 외에 행정예고안에 반대하는 이가 없어 표결이 필요하지 않았다”며 “법적으로 반드시 표결을 거쳐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시절인 2011년 ‘민주주의’ 표현을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2009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한 바 있는데, 이 부총리의 교육부에서 또 다시 ‘자유민주주의’ 끼워넣기가 강행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성명을 내어 “이 부총리가 재취임하자마자 이명박 정부 때 추진했던 뉴라이트 역사 인식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고 비판했다. 박래훈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2011년에도 이 부총리가 교과부 장관에 올랐을 때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넣었는데 10여년 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며 “민주주의 안에 포함된 여러 의미를 무시한 채 윤 정부가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넣는 것은 획일화된 역사관을 강요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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