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히어로] 발칸의 마라도나이자 이 시대 마지막 10번, 게오르게 하지

김형중 2022. 11. 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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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마크 도일, 김형중 기자 = 이탈리아가 사상 처음으로 2회 연속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기 몇 년 전, 게오르게 하지는 경고를 했다. “넘버 10 선수들을 키워야 한다. 이탈리아에는 진정한 10번이 없다. 이것이 아주리 군단의 진짜 문제다” 그가 2015년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골잡이의 부재는 지난 몇 년 간 큰 문제로 다가왔고, 이탈리아는 진정한 10번 선수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비단 이탈리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현대축구에서 10번 선수들이 역할이 모호해지고 있다. 하지만 하지와 같은 10번은 다른 얘기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창의적인 플레이에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 득점을 해내는 유형 말이다.

루마니아 출신 하지는 트레콰르티스타의 올드 버전이다. 느리고 신경질적이며, 꾸준하지도 않다. 그러나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그게 바로 월드클래스가 될 수 있던 이유였다. 하지의 천부적인 재능은 어린 시절 때부터 나왔다. 11세 때 프로팀에 입단했고, 1989년에는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소속으로 유러피안컵 결승에 올라 AC밀란을 상대했다. (경기에선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AC밀란의 아리고 사키 감독은 하지의 플레이에 반해 이듬해 영입을 시도했지만, 그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레알 마드리드 이적으로 마음을 굳혔다.

레알 마드리드의 라몬 멘도사 회장은 하지의 결정에 부리나케 루마니아로 날아가 딜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하지가 스페인에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하지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스포트라이트에 힘겨워했고, 휴고 산체스 같은 스타 선수들의 위엄에 부담을 느꼈다.

훗날 그는 실패를 인정했다. “실패였다. 슈퍼스타들을 마주하니 오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라리가에서 두 시즌을 보내고 당시 이탈리아 브레시아로 깜짝 이적했다. 루마니아 레전드 미르케아 루체스쿠의 유산이자 루마니아 축구의 혁명가였지만 그는 브레시아의 세리에B 강등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는 세리에B에서의 맹활약으로 자신감을 얻고 1994 미국 월드컵에 나섰다. 그리고 조별예선 첫 경기 콜롬비아를 상대로 34분 만에 득점포를 가동했다. 파세데나 로즈볼 스타디움의 왼쪽 사이드라인 근처에서 골키퍼가 나온 것을 보고 장거리 슈팅을 시도했고, 아름다운 궤적으로 날아간 볼은 그대로 골키퍼를 넘어 골망을 출렁였다. 하지의 천재성이 돋보인 골이었다. 아무도 슈팅을 시도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것도 왼발로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리고 스트라이커 플로린 라두치오유에게 정확한 패스를 통해 도움을 2개를 적립했다. 1골 2도움, 하지는 루마니아의 첫 경기를 3-1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콜롬비아를 분석할 때 골키퍼 코르도바의 스타일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코르도바가 골문을 뒤로 한 채 자주 나오는 것을 알아챈 하지는 이날 득점 전까지 2번의 장거리 슈팅을 시도했었고, 3번 만에 골맛을 봤다.

1994 월드컵에서 하지는 자신의 왼발 하나로 상대 수비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발칸의 마라도나’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사실 하지의 이 별명은 조금 과장되었다는 꼬리표가 오랜 시간 따라다녔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활약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16강에서 만난 루마니아와 아르헨티나의 경기 때 하지와 마라도나의 대결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마라도나는 금지 약물 복용 혐의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아 두 왼발 장인 10번들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마라도나는 없었지만 두 팀의 경기는 월드컵 역사에 남을 만한 명경기였다. 루마니아는 일리 두미트레스쿠의 센스 있는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뽑아냈고,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페널티킥 동점골에 이어 2분 뒤, 두미트레스쿠가 다시 한번 득점에 성공했다. 후반 13분에는 두미트레스쿠의 패스를 받은 하지가 왼발이 아닌 오른발로 아르헨티나 골문을 가르며 쐐기를 박았다. 한 골을 내주긴 했지만 경기는 3-2 루마니아의 승리로 끝났다.

루마니아를 이끌던 앙헬 요르다네스쿠 감독은 이날 승리를 가리켜 “혁명 이후 루마니아 국민들을 위한 최고의 이벤트”라고 칭했다. 그리고 팀의 리더 하지는 8강에 오른 나머지 7팀을 보며 “우리보다 강한 팀을 찾을 수가 없다”라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대회 당시 루마니아는 축구 팬들의 많은 성원을 받았다. 매우 공격적인 팀으로서 게오르게 포페스쿠의 중원 컨트롤, 우측 윙백 댄 페트레스쿠의 폭발적인 공격 가담 등이 매력적이었다. 반면 조별예선에서 스위스에 1-4로 패하는 등 수비에서의 약점은 존재했다. 어쨌든 루마니아의 경기는 재미가 보장되었고 스웨덴과의 8강전도 팬들의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들은 연장 후반 5분을 남겨두고 동점골을 허용했고 결국 승부차기 끝에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 루마니아가 준결승에 올랐다면 브라질을 상대했다.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 보다 더 브라질 같은 축구를 했던 루마니아가 진짜 브라질을 상대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팬들이 많았다. 하지와 호마리우의 맞대결도 큰 기대를 모았었다. 하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훗날 하지는 “우리는 참 운이 없었다. 그 대회에서 나는 최고의 선수였는데 우리는 탈락했다. 나도 최고의 선수 타이틀을 잃고 말았다”라며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하지의 활약이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웨인 그레츠키의 루마니아 버전’이라고 불렸고, 월드컵 이후 바르셀로나의 부름을 받아 라리가에 재입성했다. 그곳에서의 2년은 레알 마드리드 시절과 비슷하게 잘 풀리진 않았지만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 감독에게 받은 지도는 훗날 갈라타사라이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루마니아로 돌아가 감독과 구단주, 아카데미 설립자가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심지어 그의 스승 루체스쿠도 하지에 대해 “꾸준하지 못한 점이 문제”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율성을 부여하면 ‘아티스트’ 면모를 보이는 하지는 루마니아 축구 역사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 시대의 진정한 No. 10이었고,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유형의 선수를 못 볼 수도 있다.


사진 = 골닷컴,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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