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보단 ‘욕망 품은 한 사람’으로 봐주길”

2022. 11. 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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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찌감치 '권력욕'에 눈 뜬 '고딩'(고등학생)이 있다.

우정도, 사랑도, 소년에겐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된다.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어우러지고, 배우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수어 통역사가 존재한다.

연극이 시작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장애인 배우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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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에이지 딕’ 연출 신재훈, 배우 하지성·김가린 인터뷰
‘리처드 3세’ 원작...국립극장 달오름서 17일 국내 초연
장애까지 욕망의 수단으로 삼는 뇌성마비 고교생
뇌병변 배우 하지성 ‘문제적 고딩’ 役으로 출연
“무대처럼 장애·비장애 공존하는 사회됐으면”
배우 구성·자막·수어통역...진화한 ‘배리어프리’
여섯명의 등장인물 저마다의 주체적 삶·조응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원작으로 한 연극 ‘틴에이지 딕’에서 주인공 리처드 역을 맡은 하지성(가운데)은 학생회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은 뇌성마비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김가린(오른쪽)은 교내 퀸카 앤으로 출연한다. 신재훈 연출(왼쪽)은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 하고, 무대에서 다양한 감각이 펼쳐지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임세준 기자

“너, 내가 불쌍해?” (연극 ‘틴에이지 딕’, 리처드의 대사 중)

여기, 일찌감치 ‘권력욕’에 눈 뜬 ‘고딩’(고등학생)이 있다.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야심가 10대. 우정도, 사랑도, 소년에겐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된다. 심지어 자신의 장애까지도.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늘 혐오를 받아왔고, 스스로도 비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살아온 인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동원하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욕망을 그리고 있어요. 전 이 사람이 장애인으로 느껴지기 보단, 욕망을 품은 한 사람으로 다가와요.” (하지성)

‘틴에이지 딕’은 도발적인 연극이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원작으로 했다. 희곡 사상 가장 뒤틀린 욕망을 가진 ‘장애인’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이 현대극은 원작의 뼈대를 가져오되, 시공간을 뛰어넘었다. ‘기형적 신체’로 인한 열등감을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채우려는 왕 리처드 3세는 뇌성마비 고등학생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극이 장애인 주인공을 그리는 방식은 기존 작품과는 다르다. 영화나 드라마가 그린 선량한 시민이나 약자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책략가인 주인공. 말끝마다 비속어가 난무하고,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이 ‘문제적 고딩’은 장애를 가진 ‘괴물’이고, 뒤틀린 욕망의 ‘화신’일까.

“리처드는 장애를 이용해 유리한 쪽으로 이득을 취하고, 본인의 장애를 농담화하기도 해요. 신체적으로 건강한 친구들이 괴롭히는 상황이 와도 같이 맞서는데, 그동안 본 적 없던 작품이라 참 재미있어요.” (김가린)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신재훈 연출가는 “ ‘틴에이지 딕’은 고전은 물론 최근의 작품과도 결이 다르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고전은 장애인을 괴물 캐릭터로 다루고, 최근의 작품들은 공동체에서의 존재 의미를 선함으로 증명하는 것 같아요. 그려지는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두 가지 모두 결국 같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 작품은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욕망이 있고, 변수가 생기면 악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신재훈)

국내 초연을 앞둔 현재 ‘틴에이지 딕’(11월 17일~20일·국립극장 달오름)은 하루에 6시간씩 막바지 연습에 한창이다. 기존 연극에선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어우러지고, 배우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수어 통역사가 존재한다. 음성해설과 자막도 더해져, 무대 언어는 보다 다양해졌다. 작품은 배우부터 내용, 형태까지 진화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무장애) 공연’을 보여준다.

“기존 배리어프리가 무대 위 공연을 객석으로 ‘배리어’ 없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 공연은 원작부터 장애인 창작자와 장애인 배우가 주체가 돼 이뤄졌어요. 관객 수용 과정에서 배리어가 없는 것, 장애인 배우가 주체로 섰다는 것, 내용도 그것에 조응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어요.” (신재훈)

‘틴에이지 딕’은 캐스팅부터 공을 들였다. 지난 7월 오디션을 통해 6명의 배우가 낙점됐다. ‘틴에이지 딕’을 집필한 중국계 미국인 마이크 루는 희곡 서문에 “주인공 리처드 글로스터와 그의 친구 바바라 벅 버킹엄 역에는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고 적어두기도 했다. 연극이 시작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장애인 배우였던 셈이다. 한국 초연에선 뇌병변 장애인 하지성 조우리가 맡았다. 하지성은 2010년 극단 애인의 창단 공연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무대에 처음 섰다. 신 연출은 배우 하지성에 대해 “표정이나 가진 질감은 부드러운데 순간 순간 넉살인 것 같은 괴팍한 성질도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리듬이 리처드와 닮았다”고 말했다. 리처드의 여자친구인 ‘학교 퀸카’ 앤은 김가린이 연기한다. 무용수를 꿈꾸는 앤처럼 김가린 역시 오래도록 발레를 했다. “무겁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춤을 출 때는 발랄해지는 모습”(신재훈)이 캐스팅의 이유였다.

김가린에겐 이번이 첫 연극인 데다, 장애인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처음이다. 그는 “처음엔 걱정도 됐는데, 부딪혀 연습하다 보니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장애의 여부가 느껴지지 않았다”며 “내게 힘들고 어려운 부분들은 비장애인과 작업할 때도 배우로서 마땅히 하게 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간에 사람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공연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한 공연 안에 여러 사람들이 다함께 존재하고 맞춰나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이 작품엔 그런 의미가 있어요.” (하지성)

무대 위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품고, 주체적 삶을 산다. 연출의 방향성은 두 가지다. “리처드의 변화를 함께 만나는 것”, “리처드와 주변 인물들의 욕망이 은근히 드러나 서로 으글으글 대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신재훈)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고,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작가의 말이 이 작품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해요. 여성에 대한 시선도 마찬가지예요. 여성이나 장애인을 연약한 존재로 그리지 않고, 장애와 성별을 떠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김가린)

“제가 속한 장애인 극단에선 연극이 ‘장애인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중심에 두고 활동하고 있어요. 장애인은 선하다는 특정한 이미지를 씌우는 것도 아니고, 대상화해 표현하지도 않아요. 그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작품을 올리고 있어요. 이 작품에서도 리처드는 장애를 떠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어요. 관객들에게도 장애보다는 그저 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요.” (하지성)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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