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넣고 ‘성소수자’는 뺀 새 교육과정, 보수 색채 강화

남지원 기자 2022. 11. 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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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7년 만에 전면 개정된 새 교육과정에서 정책연구진의 동의 없이 ‘민주주의’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하고, 사회적 소수자의 사례 중 ‘성소수자’를 제외했다. ‘노동자’라는 용어도 ‘근로자’로 바꾸고 기업의 자유를 강조했다. 초·중·고 교과서의 기반이 되는 교육과정이 전반적으로 보수 색채를 띠게 되면서 교육계에 해묵은 이념 논쟁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교육부는 9일 초·중등학교 및 특수교육 교육과정(2022 개정 교육과정)안에 대한 행정예고를 했다. 교육과정은 초·중·고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과목의 종류와 학습범위, 학생들이 꼭 배워야 할 성취기준 등을 담고 있다.

2015년 이후 7년만에 전면 개정된 이번 교육과정에서는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이 확대됐고, 정보교육 시수가 2배 늘어나는 등 디지털 교육도 강화했다. 교육부는 교과별 정책연구진이 만든 교육과정 시안에서 쟁점 내용 등을 수정해 행정예고안을 마련했다.

연구진 반대에도 민주주의 앞에 ‘자유’ 넣었다

교육과정 시안이 공개됐을 때부터 거센 논란이 일었던 역사과·사회과 교육과정의 일부 기술이 행정예고안에서 대폭 수정됐다. 역사과 교육과정 성취기준과 해설의 ‘민주주의’ 용어 중 일부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변경됐다.

자유민주주의는 그간 보수진영이 주로 사용한 용어다. 보수진영에서는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언급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라고 쓸 경우 ‘인민민주주의’를 포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보진영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반공주의 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됐던 용어라는 점에서 교과서에는 더 보편적인 단어인 ‘민주주의’라고 써야 한다고 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쓰는 나라는 독일뿐이고, 그나마도 ‘민주주의‘를 주로 쓰면서 혼용하는 수준이다.

자유민주주의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교과서에 등장한 것은 이명박 정부 때 만들어진 2009 개정 교육과정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다가 폐기된 국정교과서에도 자유민주주의 용어가 사용됐다.

교육부는 헌법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있는 점, 법률과 과거 교육과정의 표현 등을 고려해 일부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꿨다고 밝혔다. 다만 ‘민주주의 발전’처럼 ‘민주주의’가 더 맥락에 맞을 때는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정책연구진은 수정에 반대했지만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내용을 수정했다고 주장했다. 역사과 교육과정을 개발한 연구진은 이날 성명을 내고 “연구진의 전문성과 자율성 보장을 전제로 교육부 담당자와의 협의를 통해 교육과정을 개발해 온 과정을 일거에 무시한 행태”라며 행정예고안 철회를 요구했다. 연구진은 성명에서 “교육부가 행정예고본(안)에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기하는 데 집착해 민주주의와 관련한 다양한 보편적 가치를 담고자 한 연구진의 의도를 왜곡하고 민주주의가 내포하는 다양성과 포용적 가치를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한 브리핑에서 “교육과정 개정안을 확정하고 고시할 법적 권한은 교육부에 있다”며 “정책연구진과 이견이 해소되지 않았으나 각론조정위원회와 개정추진위원회, 법적 기구인 교육과정심의회 등의 논의를 거쳐서 수정·보완을 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차별’ 교육하면 성정체성 혼란 온다는 교육부

고등학교 통합사회 성취기준 해설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예시로 다룰 수 있다고 제시된 ‘성소수자’ 역시 정책연구진 동의 없이 빠졌다. 이에 따라 사회적 소수자의 예로는 ‘성별, 연령, 인종, 국적, 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구성원’만이 포함됐다.

장홍재 교육부 학교교육지원관은 “성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인 청소년기에 성소수자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 성 정체성을 혼란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덕과 교육과정의 ‘성평등’이라는 용어는 ‘성에 대한 편견’이라고 바뀌었다. ‘성평등’ 용어가 제3의 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온 일부 보수 기독교계의 주장을 의식해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장 차관은 “(성소수자의) 법적 권리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 그런 현상 자체를 문제시해 논의 자체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며 “교육과정이 모든 가치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상식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르쳐야 할 사안들을 담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노동자’ 대신 ‘근로자’, 자유경쟁과 시장경제 강조

사회과에서는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던 기존 서술이 ‘기업의 자유’와 ‘자유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를 명시하는 방향으로 대폭 수정됐다. ‘노동자’ 용어도 전부 근로자로 변경됐다. 애초 교육목표로 제시될 예정이었던 노동교육, 전 교과에 반영하기로 한 민주시민교육은 총론에서 빠졌다. 총론에 반영하기로 했다가 빠져 논란이 된 생태전환교육은 총론 교육목표가 아닌 개정 배경에만 ‘기후생태환경변화 등에 따른 미래사회의 불확실성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명시됐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의 행정예고 기간은 오는 29일까지 20일간이다. 교육과정 시안은 교육부 홈페이지 행정예고란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우편·팩스·e메일 등으로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교육부는 행정예고 결과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심의회 논의와 국가교육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 12월 말까지 2022 개정 교육과정 최종안을 확정해 고시할 예정이다. 새 교육과정은 2024년 초등학교 1·2학년을 시작으로 학교 현장에 순차 적용된다.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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