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의 신전[오늘을 생각한다]

2022. 11. 9.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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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상 깊게 본 다큐멘터리 영상 2편이 있다. 공교롭게 모두 빵공장 이야기다. 하나는 SPC 빵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였다. 동양 최대규모라는 SPC 평택공장은 반도체공장 못지않은 첨단 위생설비를 자랑한다. 먼지 하나 묻을까 빵의 ‘안전’을 귀하게 여기는 공장이지만 사람의 안전은 조금 다르게 취급된다. 이곳 노동자들은 주야 맞교대로 12시간씩 빵을 만든다. 각자 하루 몇백개씩 주어지는 할당량을 채우려면 화장실에 갈 시간도,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하다. 과로는 사고를 낳는다. 이들에게는 피로를 풀 휴게실도, 사고를 감독할 관리자도, 불의의 순간 목숨을 지켜줄 안전덮개도, 자동 멈춤장치도 없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2인 1조 근무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이 거대한 공장은 사람이 빵을 모시는 신전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방의 한 빵공장 이야기다. 이 허름한 공장은 50년 전 쓰던 석탄보일러로 빵을 굽는다. 이곳 노동자들도 하루 12시간씩 고된 노동을 한다. 도네츠크는 지난 수개월간 가장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지역이다. 노동자들은 폭격 중에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다른 빵공장들이 폭격을 당해 파괴됐거나 가스가 끊긴 상황이어서 이 공장마저 멈추면 주민들이 굶기 때문이다. 이 공장은 파리바게뜨에 진열된 제품처럼 예쁘고 화려한 빵을 만들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품질이 더 떨어지는 빵을 개발했다. 싼 가격에 빵을 만들어 한명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서다. 돌덩이 같은 빵을 받아 든 할머니는 그저 고맙다며 울먹인다. 이 허름한 공장은 사람을 모시는 신전이다.

얼마 전 빵공장에서 사람이 죽었다. 회사는 다음날 노동자가 빨려들어간 기계를 천으로 가린 채 공장을 가동했다. 헷갈리지 마시라. 이것은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돌아가는 빵공장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의 최첨단 빵공장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멈추면 누가 굶는 것도 아닌데 공장은 악착같이 돌아간다. 빵을 모시는 공장에서 사람을 위한 시간은 없다.

똑같이 고된 업무를 견뎌내는 두 공장의 노동자들이지만 이들에게 ‘빵’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도네츠크 노동자들은 폭격의 전쟁통에서도 하루하루 자부심을 느끼며 빵을 굽는다. 오직 회사의 이윤을 위해 비인간적인 노동에 투입되는 SPC 노동자들은 출근길이 두렵기만 하다. 지난달 사고 희생자가 남긴 마지막 문자메시지에는 다음날 업무량에 대한 걱정과 “난 이제 죽었다”는 절망의 토로가 담겨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빵공장과 사람이 죽어가는 빵공장. 둘의 대비를 보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생각한다. 사람은 존엄을 위해 고된 노동도 견딜 수 있지만, 존엄이 없는 노동은 그 자체로 죽음과 다름없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빵이 사람을 먹이고 살려야지 사람이 빵을 모시는 것은 이상한 세상 아닌가. 무슨 놈의 세상이 빵을 만들다 사람이 죽느냔 말이다.

정주식 직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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