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아닌 배역을 연기할 뿐"…무대 위 '저신장 배우' 김범진 [조재현의 조명]

조재현 기자 2022. 11. 9. 0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극·현대무용 넘나들며 맹활약
'리처드 3세' 연기하고파…"콤플렉스 어떻게 풀어낼지 나도 궁금"

[편집자주] 조명(照明). 사전적으로는 '광선으로 밝게 비추거나 무대의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 빛을 비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또 '어떤 대상을 일정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뜻도 있습니다. [조재현의 조명]을 통해 '다양한 빛' 아래 살아가고 있는 문화·예술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볼까 합니다. 묵묵히 제 몫을 하는 문화·예술인들 모두 조명받을 이유는 충분하니까요.

지난 9월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무장애 음악극 '합★체'에서 연기 중인 배우 김범진(사진 가운데) (국립극장 제공)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좋은 공이 가져야 하는 조건, 그중 제일 중요한 건 공의 탄력도. 땅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힘. 절대 깨지지 않고 힘차게 힘차게 튀어 오를 힘.'

지난 9월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무장애 음악극 '합★체'. 저신장 아버지와 비장애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의 고민을 다룬 작품이다. 형제의 지상 최대 목표는 '키가 크는 것'. 아버지는 그런 형제를 향해 '좋은 공'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내면의 탄력도가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작품 속 아버지는 숱하게 '난쟁이'(키가 작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올바른 표현은 아님)로 불린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 아버지가 한참 맴돌았다. 아버지 역을 연기한 것은 저신장 장애를 가진 배우 김범진(31). 실제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해 공감을 끌어내겠다는 연출 의도는 적중한 셈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았단다. 그저 연기해야 할 역할이 '저신장 아버지'였다는 것. 작품 속 '쿨했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나대는 것'을 좋아하고, MBTI(성격유형지표)도 'ENFP'(재기발랄한 활동가형)라는 그를 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저신장 배우 김범진이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장수영 기자

◇ 장애라는 그림자에 숨지 않은 청년…CJ토월극장에 서다

김범진은 학창 시절부터 이른바 '분위기 메이커'였다. 본인이 있는 공간이 늘 밝은 게 좋았단다. 물론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 작은 키에 대한 친구들의 호기심은 놀림으로 변질되기 일쑤였으나 아픔을 쉬이 잠재웠다. '합★체'에서 연기한 '아버지'와 같았던 부모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격은)아무래도 부모님의 역할이 컸죠. 장애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신체적으로 남과 다를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아들'이라는 생각이 있으셨는지 배려나 특별 대우는 하지 않으셨어요."

김범진은 올해로 데뷔한 지 8년 차다. 연극 '페리클레스'(2015), '코리올라누스'(2021) 같은 대작에도 출연한 바 있다. 사실 첫 꿈은 개그맨이었다. "고3 때 방과 후 활동 목적으로 친구들과 만든 연극부 활동에 재미를 붙였고, 개그맨도 연기가 기본이라는 생각에 방송연기학과를 택했죠. 근데 학교생활을 할수록 배우란 직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일단 대학로에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어요. 극단 시스템도 전혀 모른 채 말이죠."

때마침 극작가로 일하던 학교 동기의 소개로 극단 오디션을 봤고, 그렇게 2015년 극단 '여행자'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양정웅 연출이 대표로 있던 극단 여행자는 연극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던 곳이다.

"사실 연기와 노래는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디션 때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죠. 대학생 때 무용 공연을 한 게 생각이 나서 팝송에 맞춰 현대무용을 했어요."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여행자는 원래부터 신체를 활용한 작품을 여럿 올린 극단이었던 것. "나중에 연출님이 말해줬어요 '몸을 잘 써서 깜짝 놀랐다'고. 그래서 오디션을 통과한 것 같아요. 비장애인보다 캐릭터가 분명한 점도 도움이 됐겠죠. 근데 9명이 오디션을 봤는데 8명이 붙었더라고요. 하하."

배우 김범진. /뉴스1 ⓒ News1 장수영 기자

김범진은 극단에 들어가자마자 대극장인 예술의극장 CJ토월극장 무대에 섰다. 양정웅 연출의 '페리클레스'였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다.

여러 역할을 소화하는 '멀티'였지만, 배우 김범진의 첫걸음은 나름 화려했다. 그는 연습을 위해 예술의전당 정문을 지날 때마다 '언제 이런 극장에 또 서 보겠나'며 파이팅을 불어넣고 또 넣었던 때라고 회상했다. 그런 그에게 잊지 못할 말을 건넨 이가 있었다.

"유인촌 선생님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난 범진이를 못 이겨'라고 하셨어요. 작은 키로 일단은 관객들에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캐릭터로는 이길 수 없다'는 의미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해주신 것 같아요."

울림은 컸다. "연극계 대선배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연극판에서 그래도 가능성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선택이 틀린 것은 아니구나 하고요."

◇ 무용까지 섭렵한 팔방미인…"도전은 나의 힘"

그는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 '대심(大心)땐쓰'(2017), '나는 스무 살입니다'(2020) 등의 현대무용 무대에도 서는 팔방미인이다. 무용을 배운 적은 없다. 춤추는 걸 좋아했을 뿐이다. 그냥 도전하는 게 좋단다.

그는 안무가 안은미와 함께한 '대심땐스'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몸은 작지만, 마음은 크다'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안 안무가가 저신장 장애인과 춤을 통한 소통의 가능성을 찾는 무대였다.

"내 장애를 무대에서 처음 말하는 공연이어서 기억에 남아요. 슬프지 않고 유쾌하게 보여줄 수 있어서 더 즐거웠죠. 장애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모습이 좋았어요."

'합★체' 공연이 끝난 후에도, 이달 6일 폐막한 제7회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KIADA)를 위해 지난 두 달간 땀을 흘렸다. 김범진은 '비보이' 김완혁(지체장애), '발레리나' 김지윤(지적장애)과 함께 '세 사람의 이야기'란 제목의 무대를 꾸몄다. 현대무용가 이루다가 안무를 맡은 이 작품에서 3명의 장애인 무용수는 비장애인 무용수와 짝을 이뤄 춤을 췄다.

공연을 마친 뒤 김범진은 "장애를 갖고 있지만 공연과 무용을 통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무대였다"며 "좋은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할 수 있어 정말 재밌었다"는 소감도 남겼다.

신체 비율이 좋은 일반 무용수들과 한 무대에 서면 위축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김범진은 무용을 통해 얻는 게 더 많다며 웃었다.

"일단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왜소증으로 인해 나이가 들수록 연골이나 척추에 쉽게 무리가 갈 수 있는데, 춤을 추며 취약한 부분의 근육을 단련하는 느낌이 커요. 그리고 춤을 췄을 때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궁금증도 있어요. 비장애인 무용수에 비해 작게 보일 테니 어떻게 하면 내 신체를 크게 보이게 할지 움직임도 연구하게 돼요."

김범진은 쉽게 각인되는 배우다. 특징이 명확해서다. 크고 작은 배역으로 쉴 새 없이 무대를 누비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많은 연출가가 다양한 예술적 상상을 하는 데 내 신체적 특징이 도움이 되는 것 같기는 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부담감도 크다. 기대치를 밑돌면 설 자리가 사라지는 냉정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결국은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지난 9월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무장애 음악극 '합★체'에서 연기 중인 배우 김범진. (국립극장 제공)

◇ 장애를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리처드 3세 연기해 보고파

김범진은 꼭 참여하고픈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극 '리처드 3세'를 꼽았다. 물론 주인공 역인 '리처드 3세'로 말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황정민 등 국내외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연기한 그 역이다.

신체적 콤플렉스에서 오는 비극을 다룬 얘기라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리처드 3세의 콤플렉스와 나의 장애가 만나면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궁금해요. 아무래도 비장애인이 장애 연기를 하다 보면 불편함이 생길 수 있는데 내 연기는 관객들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국립극장은 오는 17~20일 '리처드 3세'를 뇌성마비 고교생 이야기로 각색한 연극 '틴에이지 딕'을 무대에 올리는데, 주인공 역은 뇌병변 장애인 배우 하지성이 맡았다)

최근 공연계는 무장애 공연(배리어 프리)에 주목한다. 장애인 배우에겐 어떨까. '합★체' 외에 '나인프리다'(2021) 등 여러 무장애 공연에 출연한 김범진은 쉽게 드러나지 않은 장벽과 마주칠 때가 있다고 귀띔했다. 장애와 관련해 과한 배려를 받는 게 또 다른 의미의 장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발전해가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이런 공연이 많아지면 배우나 제작진의 인식도 차츰 변하겠죠."

장애인 배우의 참여도 늘면서, 배우 간 호흡도 중요해졌다. "연기할 때 신체적 한계로 안 되는 것은 먼저 확실히 알려줘요. 장애에 대한 공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장애인 배우들은 모르니까. 먼저 얘기해주면 동료들의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거든요."

기사를 쓰면서 인터뷰 도중 '장애에 대한 인식이 다소 부족했다'고 돌아보게 한 질문을 그대로 싣는다. 수많은 작품 속에서 만날 김범진을 더 이상 저신장 배우라는 시선으로만 볼 필요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문: 혹시 장애인 역과 비장애인 역을 맡을 때 느낌이 다른 게 있나요. 답: 다를 바가 없어요. 장애 유무를 떠나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은 다 똑같으니까요.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의 연기가 따로 있다고 보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요.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cho84@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