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23. 춘천커피
50년째 요선동 골목 터줏대감 역할
과거 공무원·문인 사랑방 등 배달 성황
70대 이상 어르신 아지트 자리매김
대표 메뉴 쌍화탕, 인삼·대추 등 푸짐
시원한 결명자 차 함께 입맛 사로잡아
1년 단골이 ‘20년 단골’ 되는 카페
달콤 쌉싸름한 추억 한 모금, 50년 전으로
“새벽 아침 커피마시는 코스, 이웃과 함께 역사 이어나가길”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은 레트로 감성의 카페와 술집들이 늘어가는 추세지만, 세월의 나이테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한 가게가 지나온 시간은 장소가 가진 이야기의 깊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따뜻한 차 한 잔에 담긴 추억을 마시러 춘천 요선동 골목길에 고목처럼 버티고 있는 ‘춘천커피’에 들렀다. 사장 이성복(67·사진) 씨가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춘천 커피문화의 초창기를 다졌던 50여년 업력의 터줏대감 같은 노포다.
카페의 조그만 문턱을 넘자, 시간여행을 떠나 온 기분이 들었다. 젊은 사람은 쉽사리 도전하기 어려운 70대 이상 노신사들의 아지트라는 것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금방 볶은 원두커피의 향이 퍼지는 가운데 80세 넘은 어르신들이 저녁 내기 겸 화투를 치고 있었다. “쌌네!” “투고!”를 외치는 소리에 기자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마치 오래 전에 본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사람의 무게를 얼마나 견뎠을지 알 수 없는 편안한 소파와 색이 바랜 벽지는 가게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가게의 대표메뉴 쌍화탕(5000원)을 주문하자, 이성복 사장은 시원한 결명자 차를 먼저 가져다 준 뒤 냄비 하나를 꺼내어 여러 재료를 섞어 끓이기 시작했다.
“풀어지기 전에 노른자부터 꺼내 먹어요.”
이 사장의 말대로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꺼내 속을 데웠다. 그리고 쌍화탕에 무엇이 담겼는지 살폈다. 인삼, 대추, 미숫가루, 생강, 호두, 잣… 푸짐한 내용물만 봐도 주인장의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마차, 율무차, 옛다방커피, 대추탕, 유자차, 한방차, 모과차, 칡즙 등이 저렴한 가격에 자리잡고 있었다.
커피는 맥심 원두커피를 종류별로 조합해 사용한다고 한다. 2000원짜리 원두커피는 당시에는 춘천에서 가장 비싼 커피였지만 이제는 춘천에서 가장 저렴한 커피가 됐다. 예전에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던 원두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춘천커피는 주인이 4∼5차례쯤 바뀌었다. 그래도 모든 주인이 적어도 10년 이상씩은 이어왔다고 한다. 이성복 사장은 2008년부터 이곳을 맡아 운영해왔다. 지금은 어르신들의 쉼터와 같은 공간이지만, 당시는 공무원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김진태 강원도지사를 비롯해 최문순·이광재 전 지사, 이재수·최동용 전 춘천시장 등 정치인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특히 공직사회에서는 새로 인사 발령이 나거나 출장에서 복귀할 때는 부서에 ‘춘천커피’ 한 잔씩 돌리는 것이 전통이었다. 다방 종업원이 함께 커피를 마시는 행위 없이, 순수 배달만 했던 춘천 커피문화의 상징과 같은 시기였다.
이 사장은 “커피 50잔을 담은 고무대야를 공무원들이 배달로 가져가던 때도 있었다”며 “커피 자판기가 들어오고 카페도 여러 곳 생기면서 배달 문화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목욕탕에서 같이 사우나를 즐기고 아침에 커피를 마신 뒤 출근하는 ‘춘목회’라는 모임도 있었다.
“새벽에 목욕 안 하면 커피 마시러 못 오는 거야. 목욕하고 드라이하고, 해장국 먹고 커피 마시고 출근하는 것이 하나의 코스였지. 그래서 춘목회라고 했는데 그분들도 거의 다 돌아가셔서 이제는 열다섯분 정도만 와.”
이른 아침, 출출한 이들을 위해 건네는 삶은 계란과 함께 나오는 빵이나 떡은 단골 손님들만 아는 메뉴다.
7일 월요일 아침. 이틀 전 화투치는 어르신들의 손사래에 미처 촬영하지 못했던 가게 내부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춘천커피에 들렀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있던 이 사장은 따뜻한 어묵탕과 삶은 계란을 선뜻 내어 주었다. 과거 한정식 집에서 일했던 그의 이력 때문인지 푹 익힌 무와 홍합, 진한 국물이 입맛을 돋웠다. “이렇게 먹으면 손님들이 그 맛을 기억하고 계속 온다”는 이 사장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사장의 말에서 세월의 흐름이 다시 느껴진다. 춘천커피에는 ‘1년 단골이 20년 단골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르신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하게 앉아있다 갈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짐작된다. 손님이 오고 갈 때마다 서로 구면인듯 인사를 나누는 것 또한 이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자주는 못가도 요선동에 가면 항상 그 가게에 가지. 문인들이 많이 모이던 자리였고 커피 맛도 좋거든. 물론 정도 많이 들었어. 주변 사람들이 합심해서 역사를 이어나갔으면 좋겠어.”
춘천커피의 단골로 꼽히는 이무상 전 강원문인협회장의 말이다. 이 전 회장은 춘천커피가 지금은 사라진 ‘예맥다실’과 함께 서예가·문인 등이 모이는 사랑방이었다고 설명을 더한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편이지만 ‘춘천커피’는 춘천고 동문회, 해병대 전우회 등 각종 모임이 이뤄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게와 함께 추억을 쌓았던 모임 인원 중 3분의 1, 또는 절반 이상은 이미 긴 여행을 떠났다.
가게는 손님과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 과거에 이름을 날렸던 커피숍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일도 힘들고, 천장에서 계속 물도 샌다. 그리고 손님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성복 사장은 “세월을 막을 수도 없고, 이제 이 일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일을 함부로 놓을 수 없다. “커피를 드시러 오시기 때문에 이분들이 더 오래 사시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성복 사장은 이곳에서 살림도 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가게 문을 열어두고 아침 손님을 맞는다. 이제는 친구들이 다 떠나가고 홀로 가게를 나서는 94세 어르신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우리 또한 운이 좋다면 그냥 그렇게 살아져 있을 것이다. 카페를 방문하는 현명한 어르신들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이 있을 때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뜻하게 잘 마시고 갑니다. 또 올게요”
인사를 나누고 가게 문을 나설 때쯤 갑자기 부모님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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