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가 눈에 차랴~ 경내는 온통 총천연색 전시장 [자박자박 소읍탐방]
공주 마곡사에 단풍 보러 갈 예정이라 했다가 지인에게 핀잔을 들었다.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인데 가을에 왜 마곡사를 가?” 공주를 대표하는 두 사찰 중 마곡사는 봄에 초록 산 빛이 곱고, 갑사는 가을 단풍이 수려하니 지금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갑사여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내친김에 두 사찰을 모두 둘러보기로 했다. 공주 시내를 중심으로 마곡사는 북쪽 사곡면에, 갑사는 남쪽 계룡면에 위치한다. 약 40㎞, 차로 1시간가량 떨어져 있다. 하루에 두 곳을 다 보기에는 무리다. 서두르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서는 여행이 아니다.
지는 가을 아쉬워 더욱 고운, 마곡사 단풍
대개 유명 사찰은 절간만큼이나 경내에 이르는 숲길이 운치 있다. 마곡사도 사찰 코앞까지 차로 갈 수 있지만 되도록이면 약 1㎞ 아래 상가지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걸을 것을 추천한다. 계곡의 물소리, 숲길의 새소리 바람소리가 세속의 번잡함을 씻는다.
매표소 앞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 새긴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마곡사는 보은 법주사,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와 함께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공통적으로 7~9세기에 창건돼 고대 한국불교와 종교 의례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사찰이다. ‘천년고찰’이라 자랑하는 사찰이 수두룩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산지 승원’은 최소한 기록으로 역사성과 보편성을 인증받은 절이다.
주차장에서 10여 분을 걸어 계곡 모퉁이를 돌면 개울가에 풍성하게 가지를 드리운 커다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잡는다. 이때부터는 문화재고 전각이고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경내로 들어서면 담장 위아래로 늘어진 단풍 속으로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긴다. 명부전과 흥성루 주변에 각각 대여섯 그루씩 뿌리 내린 단풍나무가 저마다의 빛깔로 관람객을 유혹한다. 아직 초록이 남은 잎부터 진한 노랑과 빨강까지, 전각 앞마당이 총천연색 단풍 전시장이다. 이곳저곳에서 낮은 탄성이 터진다. 큰소리로 방정을 떨다가는 우수수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서 모두 조심스럽다. 지는 가을이 아쉬워 별빛처럼 영롱하고 보석처럼 찬란하다. 지난 3일 마곡사의 풍경이다.
그렇게 한참 단풍 그늘을 헤매다 보니, 뒤늦게 세계문화유산 마곡사가 눈에 들어온다. 마곡사는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사찰처럼 분리돼 있다. 각각 남원과 북원이라 부른다. 단풍이 고운 남원은 임진왜란 때 승병의 집결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18세기에 현재 구조로 복원됐다고 한다. 흥성루 해탈문 천왕문 영산전 매화당 등이 한 묶음이다.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내부에 1,000개의 불상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건물은 소박한데 현판은 조선 세조가 썼다고 한다. 단풍에 홀려 지나쳤던 해탈문과 천왕문 주변에 노란 국화가 만발해 있다. 경내에 쌉싸래한 가을 향기가 진동한다.
개울 건너 북원에 본당이라 할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위아래로 분리된 건물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는 독특한 배치다. 마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로 선종이 확산되던 9세기에 중창됐다. 주불전인 대광보전 마당의 오층석탑은 익숙한 듯 낯설다. 상륜부가 고려 말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불교 양식이기 때문이다. 머리장식으로 풍마동(風磨銅)을 올렸는데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로 평가된다.
마곡사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깊다. 대광보전 옆에 백범당과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다. 백범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이고 사형수로 복역 중 탈옥해 1898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마곡사에 머물렀다. 그가 은신했던 백련암은 본당에서 약 1㎞ 떨어져 있다. 경내 주차장에서 산자락으로 ‘백범 솔바람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포장도로로 올랐다가 숲길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로 1시간 남짓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다.
백련암의 외형은 살림집처럼 수수하다. 마곡사에서는 높은 위치라 담장 너머로 솟은 감나무 사이로 아랫마을 민가가 걸쳐진다. 백련암 뒤편에 불상이 새겨진 조그만 바위가 있다. 이곳까지 발걸음 하는 이들은 대부분 암자가 아니라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이 불상을 바라고 온다. 인자한 미소의 번듯한 마애불을 상상했다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불상은 윤곽이 또렷하지 않아 표정을 제대로 읽기 힘들다. 보기에 따라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천진하다. 어쩌면 그 평범함에 비범함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려오는 산길에서 또 다른 암자인 은적암 스님이 하염없이 쌓이는 낙엽을 쓸고 또 쓸고 있었다.
어우러짐이 으뜸 사찰, 갑사
단풍나무만 빛깔이 고울까. 찬바람이 불면 모든 낙엽활엽수는 생장을 멈추고 잎을 떨어뜨린다. 초록이 사라지면 천차만별 고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추갑사(秋甲寺)’는 어우러짐의 백미다. 단풍이 곱다고 자랑하는 ‘오리숲길’에 실제 단풍나무는 많지 않다. 대신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참나무 거목을 비롯한 여러 활엽수가 어우러져 멋들어진 가을 풍광을 빚는다. 화려하지 않지만 다채롭고 풍성하다.
글자 그대로 풀면 갑사는 사찰 중에 으뜸 사찰이다. 백제 시대인 420년에 창건해 통일신라시대에 ‘화엄십찰’로 번창했다고 자랑하지만, 현재 위상은 마곡사에 딸린 절이다. 그럼에도 관광지로 더 널리 알려진 건 계룡산의 절경과 역사적 무게 때문이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내는 오악(五嶽)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묘향산, 지리산과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중악단이 있었다. 주봉인 천황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마치 닭 볏 같아서 ‘금계포란형’, 용의 모양을 닮아 ‘비룡승천형’이라 부른다. 그 때문에 한때는 골짜기마다 자칭 ‘도사님’이 넘쳐나기도 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1968년 경주·한려해상과 함께 국내 두 번째로 국립공원에 지정됐다. 그 중심에 갑사가 있다.
갑사 가는 길은 입구부터 가을빛이 찬란하다. 초입의 계룡저수지 수면에 비친 산 능선이 수려하다. 탐방로가 조성된 가장자리로 반짝이는 햇살이 눈부시다. 주차장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심겨 있다. 떨어지는 은행잎이 차량이 지날 때마다 하늘하늘 나부낀다.
주차장에서 절간까지 숲길은 거의 일직선에 가깝다. 경사도 완만해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빛깔 고운 단풍나무는 이 길에서 약간 비껴난 생태탐방로에 더러 있다. 갑사 경내에도 단풍나무는 많지 않다. ‘계룡갑사’ 현판이 걸린 강당 앞, 삼성각과 공우탑 주변에 몇 그루 있을 뿐이다. 삼성각 주변 단풍나무 뒤로는 닭 볏을 닮았다는 계룡산 능선이 손에 잡힐 듯 웅장하다.
절간 바깥 길가의 공우탑(功牛塔)은 이름대로 소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갑사는 건물 몇 채만 남고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1604년 나라의 지원으로 중건했다. 이때 주지스님의 꿈에 황소가 나타나 공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실제로 소 한 마리가 매일 중건에 필요한 재목을 실어 날랐는데 불사가 완공되는 날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사실에 전설을 덧씌운 듯하다.
‘오리숲길’은 일주문에서 경내를 거쳐 사찰 뒤편 용문폭포까지 이어진다. 사찰을 지나면 절반은 시멘트 포장도로이고, 절반은 울퉁불퉁 거친 돌길이다. 자연 그대로의 계룡산 속살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길이다.
용문폭포는 경치가 빼어난 갑사구곡 중 제8경에 해당한다. 가을엔 단풍이 곱고 여름엔 그늘이 시원해 연중 탐방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곳이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막상 도착해 보니 물줄기가 가늘어 다소 초라해 보인다. 다만 물이 많지 않은 계곡에 깊어가는 가을 정취가 하나둘 쌓이고 있었다. 지난 4일 풍경이다.
마곡사에 백범이 있다면, 갑사에는 영규 대사가 있다. 용문폭포 부근 대성암 인근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작은 공원이 있고 갑사 경내에는 ‘영규대사비’가 세워져 있다.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며 무예를 익힌 영규 대사는 임진왜란 때 대규모로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성 전투와 금산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불교계에서는 조헌 장군이 이끈 의병은 금산 칠백의총에서 추모하고 있는데, 영규 대사 휘하에서 목숨을 바친 1,000승병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의 무덤은 갑사 가는 길 초입 계룡면 유평리에 있다.
공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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