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금희]슬픔이 숨지 않도록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2022. 11. 9. 03:03
핼러윈에 이태원 간 것 잘못 아니지만
현장 생존자들 비난받을까 사실 숨기기도
그들이 겪은 슬픔, 나눌 수 있는 사회 돼야
현장 생존자들 비난받을까 사실 숨기기도
그들이 겪은 슬픔, 나눌 수 있는 사회 돼야
김연수의 근작 ‘난주의 바다 앞에서’에는 아이를 잃고 혼자가 된 엄마 은정이 등장한다. 그는 차를 몰고 낯선 지방을 정신없이 떠돌다가 육지의 끝인 남쪽 바다로 향한다. 그곳은 200년 전 천주교도 박해로 가족을 잃고 갓난아이인 자기 아들 또한 관노가 될 처지가 된 정난주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정난주는 귀양선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몰래 아기를 절벽 바위 아래 내려놓았고 먼 제주로 혼자 끌려갔다. 그 난주의 바다에서 은정은 “울고 또 울고 난 뒤에” 자신의 슬픔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10월 29일의 참사가 닥친 한 주 동안 자주 이 소설을 떠올렸다.
누구도 거리를 걷다가 죽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연인과 친구와 가족과 외출에 나섰다가 죽어서는 안 된다. 시장은 시민을 지켜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며 그 과정의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이것은 어떤 ‘쟁점’의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전제는 분열의 사회에서 쉽게 변질되며 악용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우리가 충격적으로 경험한 것처럼 희생자들을 도리어 모욕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공격하여 추모와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사회란 쉽게 말해 슬픔을 통제하는 사회다. 누구나 슬픔 앞에서는 가장 밑바닥까지 무너져 약자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약자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나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이 가장 약한 존재가 되었을 때 사회가 구조에 관심 갖지 않는다면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그 역시 사회를 불신하고 구성원이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쇄된 상실이 이 공동체에 어떤 불행을 안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참사가 일어난 날이 핼러윈이었다는 것,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갔다는 것은 이 비극을 정의하는 데 아무런 관련이 없다. 수난에 분노하지 않고 수난당한 자들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 당했을지도 모를 불행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자 호들갑스러운 안도의 표출에 불과하다.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
하지만 참사 직후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날 현장에 있었던 청년들 중에는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주위에 알리지 못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누가 그에게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숨기게 만들었을까? 현장에서 겪은 트라우마는 개인이 혼자 감당할 수도 없고 감당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에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아마 그간 우리 사회가 슬픔을 핍박했던 많은 사건들이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넘었을 그에게 그런 절박한 자기 보호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기성세대로서 참담함을 느낀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의 은정은 정난주의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그 이야기에서 정난주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아들을 비극적 운명에서 확실히 구해내려 한다. 자기가 죽었을 때 자식 또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사람들을 속이고자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에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거나 그들을 구해주지 않았던” 신에 대한 원망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과 슬픔 속에 선택한 자기희생은 정난주가 믿었던 그 신에 의해 정확히 거부된다. 신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정난주를 건져 올리고 마치 첫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하듯 새로운 기도를 가르친다.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라는, 슬픔에 빠진 자를 슬픔의 희생자가 아니라 슬픔의 굳건한 ‘생존자’로 만드는 말이었다.
이것은 아마 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참사 이후를 살아가야 할 모두를 위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태원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여진 같은 상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그 현장에서 사고를 직접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 구조에 나섰던 숱한 사람들, 상인들의 고통과 슬픔은 얼마나 깊고 오래 갈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에 죄책감 속에 더 터져 나올 수 없을 그 슬픔이 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책임과 무관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추궁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이 사회가 만들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우리의 동생, 우리의 이웃, 우리의 동료, 친구, 연인이었던 분들의 명복을 간절히 빈다.
누구도 거리를 걷다가 죽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연인과 친구와 가족과 외출에 나섰다가 죽어서는 안 된다. 시장은 시민을 지켜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며 그 과정의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이것은 어떤 ‘쟁점’의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전제는 분열의 사회에서 쉽게 변질되며 악용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우리가 충격적으로 경험한 것처럼 희생자들을 도리어 모욕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공격하여 추모와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사회란 쉽게 말해 슬픔을 통제하는 사회다. 누구나 슬픔 앞에서는 가장 밑바닥까지 무너져 약자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약자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나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이 가장 약한 존재가 되었을 때 사회가 구조에 관심 갖지 않는다면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그 역시 사회를 불신하고 구성원이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쇄된 상실이 이 공동체에 어떤 불행을 안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참사가 일어난 날이 핼러윈이었다는 것,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갔다는 것은 이 비극을 정의하는 데 아무런 관련이 없다. 수난에 분노하지 않고 수난당한 자들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 당했을지도 모를 불행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자 호들갑스러운 안도의 표출에 불과하다.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
하지만 참사 직후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날 현장에 있었던 청년들 중에는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주위에 알리지 못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누가 그에게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숨기게 만들었을까? 현장에서 겪은 트라우마는 개인이 혼자 감당할 수도 없고 감당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에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아마 그간 우리 사회가 슬픔을 핍박했던 많은 사건들이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넘었을 그에게 그런 절박한 자기 보호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기성세대로서 참담함을 느낀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의 은정은 정난주의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그 이야기에서 정난주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아들을 비극적 운명에서 확실히 구해내려 한다. 자기가 죽었을 때 자식 또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사람들을 속이고자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에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거나 그들을 구해주지 않았던” 신에 대한 원망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과 슬픔 속에 선택한 자기희생은 정난주가 믿었던 그 신에 의해 정확히 거부된다. 신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정난주를 건져 올리고 마치 첫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하듯 새로운 기도를 가르친다.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라는, 슬픔에 빠진 자를 슬픔의 희생자가 아니라 슬픔의 굳건한 ‘생존자’로 만드는 말이었다.
이것은 아마 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참사 이후를 살아가야 할 모두를 위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태원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여진 같은 상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그 현장에서 사고를 직접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 구조에 나섰던 숱한 사람들, 상인들의 고통과 슬픔은 얼마나 깊고 오래 갈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에 죄책감 속에 더 터져 나올 수 없을 그 슬픔이 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책임과 무관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추궁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이 사회가 만들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우리의 동생, 우리의 이웃, 우리의 동료, 친구, 연인이었던 분들의 명복을 간절히 빈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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