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한글 만만세다
막 말문이 터졌을 무렵, 어린 손자는 나더러 ‘하바가지’라 불렀다. 오렌지 주스는 ‘아멍기 아뚜’. 제 귀에 그렇게 들렸는지, 아직 입놀림이 서툴렀는지, 아니면 또 내가 제 말을 잘 못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한글로 적는다면 그렇다. 사실 자기 나름 들은 자연 소리를 딱히 흉내 내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글자로 표현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이 나라 저 나라 동물 울음이 그닥 별다르지 않을 텐데 그걸 문자로 옮기는 의성어는 뜻밖이다. 우리는 돼지 울음을 ‘꿀꿀’이라 적지만 영국은 ‘오잉크’, 일본은 ‘부우부우’ 제각각이다. 닭 소리도 영국은 ‘코커두들두’, 일본은 ‘코케콕코오’, 우리는 ‘꼬끼오’라 쓴다. 어려서부터 “오리는 꽥꽥, 염소는 메에, 돼지는 꿀꿀” 이렇게 학습한 탓에 우리는 돼지가 내는 소리는 그냥 ‘꿀꿀’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마다 발음의 장단, 고저, 말소리가 다 다른데 그걸 가려 하나로 알아듣는 것도 신기하다. 인간의 두뇌 그 능력의 한계는 요지경 속이다. 특히 사투리가 더 그렇다. 표준어는 우리가 정한 단어를 배워 쓰니까 하나로 발음하게 되지만, 사투리는 제 듣고 익은 대로 쓰니까 나름나름 말하고 적는다. 그래서 사투리로 적은 글은 한참 되읽어보아야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말로 하면 쉬 알아듣는 게 또 희한하다.
일본사람이 하는 영어는 특색이 있다. 이건 그들의 구강구조 탓이 아니라 그들이 어려서부터 쓰던 말의 음절이 단순하고 받침을 안 써서 그리 굳어졌기 때문이다. 문자로 사용하는 음소가 단순하면 그 나름 장점도 있겠지만 자연음이나 다양한 소리를 문자로 옮기는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물론 우리도 혀를 부드럽게 놀리며 영어를 하기 어렵지만 영국사람 역시 우리말을 자연스레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다.
문화재라 하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숱한 백성들의 고혈을 응축한 결정의 다른 말이다. 고인돌이나 성곽, 진시황릉 병마용갱 같은 유형문화재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무형문화재는 그런 착취가 없는 공동 지성의 산물이다.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란 뭐니 뭐니 해도 단연 한글이라 꼽는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소리를 정리하고 이들을 표현할 글자를 컴퓨터도 녹음 장치도 없는 먼 옛날에 세종대왕 한 분이 창조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축복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국뽕’을 혐오한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한글은 이 세상 최고의 문자다. 한글은 로마자 알파벳보다 더 많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고 배우기도 쉽다. 가독성도 뛰어나다. 영어는 소리 나는 대로 적지 않는다. ‘단게르(danger)’라 쓰고 ‘데인저’로 읽는다. ‘푸르(fur)’라 적고 ‘퍼’라 발음한다. 그러나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적고 읽는 문자다.
한때 어느 한글학자가 한글을 알파벳처럼 줄줄이 쓸 수 있도록 변형을 구상하고 시도한 적이 있는데 그건 자음과 모음, 그리고 받침으로 이루어진 한글 체계를 부수는 짓이다.
어릴 때 일이다. 새엄마가 따져들 듯 퉁명스레 쏘아붙이는 게 아무래도 내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몇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나만 아는 글자를 만들어 써야겠다고 작정했다. 하지만 내 능력상 그 틀은 어차피 한글에 기초한 방식이었고 만들어 쓰기도 어려웠지만 읽는데도 더듬거릴 수밖에 없어 결국 포기했다. 그 일 이후 차라리 더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한글이 알파벳 p와 f를 구별해서 쓸 수 없어서 영어보다 모자라다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말이 그런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그리 가려 적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쓰지 않는 말까지 다 표현하는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연의 소리를 낱낱이 적을 수 있는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말이 무리하게 혀를 굴리지 않아도 되고 또 촐싹거리지 않고 점잖은 느낌이어서 좋다. 우리말은 더께더께 포개어 온 유구한 우리 역사의 산물이자 문화의 정수고 정체성이다. 그런 말을 표현하는 기막힌 우리 고유의 문자 한글이 있다. 암만 뻐겨도 부끄럽지 않을 우리 문화의 힘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날마다 흔감해서 갈고닦아 써야 한다. 허튼 생각하지 마라.
구영기 전 생명그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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