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옛 절터에서 받는 위로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 소장 2022. 11. 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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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지치고 힘들 때, 위로가 필요한 순간 무엇이 생각날까. 가족, 친구, 따듯한 포옹, 다정한 말, 좋아하는 음식 등이 생각날 수 있다. 종교가 있다면 믿고 의지하는 신(神)을 떠올릴 것이다. 위안이 되는 나만의 장소를 찾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허망하다 느낄 때면 옛 절터인 폐사지를 찾는다. 그저 비어있으나 가득 차 있는 곳은 차분하게 나를 가라앉히고 돌아보게 한다. 해거름에 그림자가 드리운 너른 터를 서성이다 가만히 앉으면, 쓸쓸한 절터가 다독여주는 토닥임이 느껴진다.

하지만 폐사지만의 그 매력을 알기란 사실 쉽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 추천했다가는 “대체 무엇을 보라는 거야. 황량하기만 하잖아” 하고 타박받기 일쑤다. 그래도 취향과 상황에 따라 강진 ‘월남사지’ 경주 ‘감은사지’ 양주 ‘회암사지’ 합천 ‘영암사지’ 화순 ‘운주사지’는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며칠 전, 지리산에 갈 예정인데 위로가 될 만한 장소를 추천해 달라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이태원 참사에 충격받은 중학생 딸을 위함이라는데, 어찌 아이뿐이겠는가. 원래 잡았던 동선에 남원 ‘만복사지’를 추가해서 다녀오라 했다. 오랜 흔적도 살피고, 만 가지 복을 받는다는 곳에서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복도 받으라 했다.

그리고, 가을 보약이라는 추어탕도 한 그릇 든든하게 먹고 오라고 단골집도 추천해 주었다. 아이와 함께 부모 마음도 보듬는 여정이었으면 했다. 충분할 수 없는 애도 시간이 지나고 있지만, 유가족은 물론이고 마음 아파하는 모든 이에게 위안이 필요하다. 그저 ‘단풍놀이’ 가고 ‘바람 쐬러 간다’는 말을 가볍게 건네며, 아름다운 산천 인증만이 SNS(소셜미디어)에 넘실거리면 좋으련만 우리의 현실이 먹먹하다.

가을빛이 깊고 찬란한 시기라 더욱 서글프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고달사지’를 찾아야겠다. ‘폐사지처럼 산다’는 시구를 읊조리다, “마땅히 어디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는 금강경 구절도 새기고 싶다. 그리고, 쓸쓸한 안부를 바람결에 흘려보내며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고 와야겠다.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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