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권모 칼럼] “그날 국가는 무엇을 했나요”

양권모 기자 2022. 11. 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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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확실히 막을 수 있었다(Absolutely Avoidable).”(뉴욕타임스 10월31일 이태원 참사 보도 제목) 대형 재난 뒤에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여 ‘막을 수 있었던 참사’를 복기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그럼에도 이태원 참사를 두고는 ‘만약에’를 뼈아프게 되뇌게 한다. 참사 이전, 참사 발생 순간, 참사 이후 구조·수습 과정에서 너무도 부실하고 무능한 정부의 대응이 드러난 때문이다. 희생자 유족들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운 이 ‘만약에’가 확인시키는 건 이태원 참사에서 ‘국가는 없었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양권모 편집인

만약에 3년 만의 노마스크 핼러윈 행사로 대규모 인원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안전관리 대책을 준비했더라면 생때같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밀집 위험을 완화하는 ‘가장 쉬운 대책’으로 꼽히는 지하철 무정차 계획만 마련했어도 참극은 피할 수 있었을 터이다.

만약에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압사’ 위험을 알리는 112신고가 빗발칠 때 묵살하지 않고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그날 이태원은 청춘의 축제장으로 온전했을 게다.

이런 기막힌 경우도 있다. 만약에 이태원 치안 책임자인 용산경찰서장이 첫 보고를 받은 뒤 신속히 이동해 참사 발생 전에 현장에 도착, 적극적 지휘로 핼러윈 인파를 통제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도보로 10분 거리를 차 안에서 1시간이나 허비해 참사 발생 50분 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만약에 재난 보고·지휘 체계가 정상 작동되어 적시에 구조와 수습 조처가 실행됐다면 희생자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경찰청장은 잠을 자느라 소방당국이 ‘대응 3단계’를 발령한 이후에야 참사를 보고받았고,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발생 1시간쯤 뒤 소방청 긴급문자를 통해 참사를 인지했다. 이태원 현장에서 수십명이 ‘심정지 상태’에 빠졌을 때야 서울경찰청장의 가용부대 급파 지시가 나왔다. 구조의 골든타임을 완벽히 놓쳤다.

만약에 경찰과 소방의 유기적 협조와 대응체계가 가동되었다면 무참한 죽음을 더 많이 막았을 것이다. 경찰과 서울시의 늦장 교통 통제로 구급대가 5분 거리를 33분 걸려 도착했다. 소방에 첫 신고가 접수된 후 1시간이 지나서야 재난의료지원팀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새 ‘심정지 상태’에 빠진 수십명의 젊은이들은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만약에’로 복기한 것들은 대단한 결단과 희생을 요하는 것들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정부로서는 응당 ‘했어야 할’ 일이다. “주최자가 없어 권한이 없다”던 변명과 달리 매뉴얼대로 진행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게 밝혀졌다. 112신고 녹취록으로 드러난 참사 직전의 상황, 참사 발생 뒤 경찰과 공직 책임자들이 보여준 대처, 수습 과정에서 엉망진창의 보고 체계와 늑장 대응은 실로 ‘정부의 부재’에 다름없다. 지난여름 서울 물난리 때 정부의 재난 대응을 보면서 SNS에 ‘#무정부 상태’란 해시태그가 번져나간 게 겹쳐진다. 재난 때마다 시민들이 ‘무정부 상태’를 떠올리는 건 참담한 일이다.

이제 참사의 원인과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따져야 할 시간이다. 총괄적으로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면 정부의 책임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정부의 제일 책무이기 때문이다. 참사 발생 후 대통령실부터 국무총리, 행안부 장관, 경찰청장, 용산구청장 등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책임 회피에 겁겁하다. 설령 경찰에 책임을 전적으로 돌린다고 해서 정부의 책임론이 벗어지는 게 아니다. 경찰 따로, 정부 따로가 될 수 없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경찰도 정부고, 대통령도 정부고, 행정안전부 장관도 정부다.”(금태섭 전 의원) 더구나 경찰만을 ‘희생제의’ 삼아 재난과 안전 관리 총책임자인 행안부 장관에 대한 문책을 회피한다면 ‘수습 참사’를 불러올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할 일을 하지 않아’ 무고한 시민 156명이 목숨을 잃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 검찰총장 시절인 지난해 8월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정부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인데, 이 정부는 정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완벽히 막을 수 있었던” 이태원 참사, 윤석열 정부는 정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이 직접 조문 온 윤 대통령에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있다고 했다. “그날 국가는 무엇을 했나요.” 이 물음에 답할 책임은 일선 경찰도, 경찰 지휘부도, 행안부 장관도, 국무총리도 아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윤 대통령이 이 아픈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양권모 편집인 sul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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