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꼬마 성인이 고해 사제에게 건넨 피로회복제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2. 11. 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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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글쟁이’ 허영엽 신부, 사제생활의 기쁨 애환 담은 ‘당신을 만나 봤으면 합니다’ 펴내
천주교 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허영엽 신부.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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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고해성사 오래 주고 계시니 많이 피곤하시죠?”

고해소에서 한 꼬마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닌게 아니라 2시간 넘게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듣던 신부는 약간 피로감이 생길 때쯤이었답니다. 아이는 “재밌는 이야기만 오래 들어도 피곤해지는데 얼마나 힘드시겠어요?”라고도 했다지요. 꼬마가 신부를 위로하는 상황이 된 거죠.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고해성사 안 볼 거니?”란 질문에 “전 어제 성사를 봤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안 봐도 돼요. 저 같은 애들이 하루 만에 무슨 죄를 짓겠어요”라며 가방을 뒤적입니다. “이걸 드리려고 왔어요”라며 꺼낸 것은 피로회복제였다는군요.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그때 그 꼬마 성인’입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의 책 ‘당신을 만나 봤으면 합니다’(가톨릭출판사) 첫머리에 실린 에피소드입니다. 허 신부는 천주교계에서 소문난 글쟁이입니다. 신학생 시절 학보 기자를 한 이후로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2004년부터 지난 8월까지 ‘서울대교구의 입’으로 홍보를 담당했지요. 이 책은 원래 2009년에 출간됐다가 이번에 개정증보한 것입니다. 저는 초판을 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이번에 나온 책 내용이 저에겐 새로웠습니다. 일반인들로서는 알기 어려운 사제 생활의 기쁨과 애환이 허 신부님의 맛깔나고 편안한 글 속에 담겨 있지요.

허영엽 신부의 책 '당신을 만나 봤으면 합니다' 표지. /가톨릭출판사

◇할머니 신자의 유산, 꼬깃하게 접은 2만원

보좌신부 시절 만난 인연을 잊지 못합니다. 수십년 전 고아원에서 울면서 허 신부의 소매를 잡고 떨어지지 않던 꼬마, 중풍 투병하던 은퇴한 선배 신부, 환자 영성체를 드릴 때 만난 할머니 등입니다. 중풍 투병하면서도 한 달에 한 번 허 신부가 방문해 미사 드리는 날엔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은퇴 사제는 “집 안에서 기다리시라”는 말에 “한 달에 한 번 예수님을 모시는 건데 어떻게 집 안에서 기다릴 수 있겠나”라고 대답했답니다. 역시 중풍으로 10년간 누워지낸 할머니는 집을 찾아온 허 신부를 만나 10년만에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지요. 할머니는 ‘다음에 오실 때에는 요구르트 하나만 갖다달라’고 했답니다. 먹고 싶은데 이불에 소변을 본다고 가족들이 주지 않는다면서요. 그렇게 요구르트를 배달하던 어느날 마지막을 느낀 할머니는 허 신부의 손에 꼬깃하게 접은 5000원짜리 두 장, 1만원짜리 한 장을 쥐어줬답니다. “나는 이제 돈이 필요없어요. 신부님이 가지고 계시다가 불쌍한 사람을 위해 써주세요”라면서. 허 신부님은 지금도 그 2만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책엔 사람 이야기가 많습니다. 수십년만에 만난 중학교 담임선생님, 김수환 정진석 추기경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느꼈던 점, 유럽에서 함께 유학한 고(故) 차동엽 신부, 행려병자를 돌보다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 평생 한센인들에게 무료로 만들어준 틀니가 5000개에 이르렀던 치과의사 강대선 선생님 등에 대한 추억이 펼쳐집니다.

허영엽 신부는 '성서의 인물' '성서의 풍속' '성경 속 궁금증' 등 성서와 관련된 책을 수십권 펴낸 다작작가이기도 하다. 사진은 2017년 성바오로딸수도회 강연회 후 독자들과 기념촬영한 모습. /김한수 기자

◇아버지와 볶음밥

가족 이야기는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어린 시절 양평에 살던 허 신부는 장날이면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중국집에 가서 볶음밥을 먹는 것이 낙이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장날, 하루종일 아무 말씀이 없던 아버지는 늦은 오후가 돼서야 자전거를 꺼냈답니다. 문을 닫았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도착한 중국집에서 아버지는 볶음밥은 한 그릇만 시키고 계속 신문을 보셨다지요. 그날 아버지 지갑엔 볶음밥 한 그릇 값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허 신부는 당시를 회상하며 “묵상 중에 아버지의 모습이 예수님과 겹쳐졌다. 아버지 등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예수님의 등에 기대고 있었다. 달리는 자전거 뒷자리에서 예수님의 허리를 꼭 붙잡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고 적었습니다.

◇짝사랑

짝사랑을 받은 경험도 토로합니다. 고교 1학년 때 연서(戀書)를 받았답니다. ‘철없는 계집애의 소망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어라 이 맘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밤하늘의 별을 동경하고, 향기로운 장미를 원하는 마음보다 더 큰 이 소망을…(중략) 오후 2시 장충단 공원 분수대 앞에서 파란 책을 들고 서 있겠습니다.’ ‘분수대’ ‘파란 책’ 등의 단어가 세월을 느끼게 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소녀로부터 받은 이 편지에 허 신부는 ‘괜스레 겁이 나서’ 공원에 가지 못했답니다. 그런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허 신부는 오래도록 이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그는 “내가 좋아하던 이들에게, 또 나를 좋아해 준 이들에게 어떤 표현도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라며 “이제라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내가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후회하는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용기 있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테니 말이다. ‘부족한 나를 좋아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주교관 지킴이 강아지 ‘연지’

명동성당 구내 주교관의 강아지 ‘연지’ 이야기는 애견인들에겐 남다를 것 같네요. 연지는 교구청 사람들에겐 신기한 녀석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울리는 삼종기도 종소리에 맞춰 ‘워, 워~’하고 울고, 사제와 수녀는 귀신같이 알아봤답니다. 심지어 사제들이 사복을 입고 있어도 아는 척 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답니다. 저도 교구청 마당에서 연지를 몇번 본 적 있는데 꽤 점잖은 녀석이었습니다. 덩치는 컸지만 성격은 온순해 ‘외부인’인 저에게도 특별한 적대감을 보이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사제와 수녀들에게 묵상 거리과 기쁨을 주던 연지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제들 근처에 잠들어 있답니다. 용인 서울대교구 성직자묘지 근처에 묻힌 것이지요.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신다

책에서 거듭 등장하는 성경 구절은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는 시편 구절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진심을 다 알고 계신다’. 허 신부 스스로 사제생활에 대한 위안이자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건네는 위로입니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추천사에서 “봄비 내리는 새벽에 허영엽 신부님의 글을 읽다가 그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마음이 치유되는 눈물이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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