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미칼럼] 이태원 참사를 ‘재난 정치’로 만들지 않으려면

황정미 2022. 11. 8.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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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기
철저한 진상·문책·재발방지책 내놓아야

미국 대통령은 ‘세계 대통령’으로 불리며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지만 연방정부에 대한 미국민 신뢰는 20% 안팎에 불과하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1965년 첫 조사 때만 해도 70%대였던 정부 신뢰도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으면서 뚝 떨어졌다. 실패한 전쟁, 지도자의 거짓말에 대한 집단 기억이 정부 불신을 키웠다고 하지만 반세기 전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권을 면치 못하는 데 대해 리처드 노이슈타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정치인들의 당파적인 정부 비판 발언이 불만을 불신으로 바꾸는 가장 큰 주범”(‘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이라고 썼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 신뢰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변수는 세월호 참사였다. 국가승인통계로 쓰이는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앙정부 부처에 대한 신뢰도는 2013년 35.3%에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32.9%로 떨어졌다. 그 이후 계속 추락해 2016년에는 24.6%에 그쳤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거치면서 바닥을 친 정부 신뢰도는 지난해 50%대를 기록할 정도로 조금씩 회복세를 보였다. 여전히 의료계나 교육계, 금융기관보다 수치는 낮지만 절반가량의 국민들은 정부가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불과 10일 전만 해도 그 수치는 유효했을지 모른다.
황정미 편집인
이태원 참사는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했다. 당연히 가장 큰 책임은 국가, 윤석열정부의 몫이다. 사고 전 112에 걸려온 신고 전화 뉴스를 접했을 때 가슴에 돌 한 덩이를 얹은 듯했다. 희생자 유가족들 마음은 오죽했을까. 이렇게 많은 이가 희생되지 않을 수 있었던 상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112 신고 이후 경찰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책임자 한 사람이라도 현장 지휘에 나섰다면, 지역 동향을 잘 아는 구청이 발 빠르게 대응했다면, 재난안전통신망이 가동됐더라면 최악의 사태는 막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태원 참사는 국가 시스템이 고장 난 대한민국의 위기다.

국가애도기간이 끝나자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책임과 내각 총사퇴를 거론하며 정권의 위기로 몰아붙인다. ‘박근혜의 7시간’처럼 참사 당일 윤석열 대통령 행적이 불투명했다면 이재명 민주당은 장외 집회라도 나섰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방어선을 치기에 바쁘다. 아무리 급해도 이 시점에 문재인정부 탓을 하는 건 무책임하다. 여당이 이번 사건을 정권의 위기로 여기고 소극적 대처나 정부 방어에 나선다면 야당이 주도하는 ‘재난 정치’는 더 요란해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세월호 사태 때 목도한 일이다.

세월호 참사가 그 자체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좌우 진영 대결로 번진 건 여든 야든 재난을 정치화한 때문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아홉 차례 조사에도 실체적 진실에 대한 합의조차 이루지 못했다. 그사이 정권이 바뀌고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세월호 사태를 연구한 사회과학자들은 “당파적 재난 정치의 심각한 해악은 재난의 근본 원인에 대한 논의를 마비시킴으로써 재난에 대한 근본적 수습이나 예방을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서울대 박종희 교수)고 했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못한 결과가 참혹한 이태원 참사다.

왜 이런 참사가 벌어졌는지 실체적 진실을 가리고 책임을 묻고 미래의 재난을 막는 일은 윤석열정부의 소명이 됐다.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철저하지 못하면 언제든 ‘재난 정치’의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 몇몇 사람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데 그쳐서도 안 된다.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대통령 말처럼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으려는 공권력, 공무원 조직의 실패에는 더 큰 책임이 따라야 한다. 대한민국 체질을 바꾸는 일대 개혁 없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추락한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긴 어렵다. 정부도, 정치권도, 언론도 이태원 참사를 ‘제2의 세월호’로 만들지 않는 일이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는다. 대한민국은 다음 정권에서도 안전해야 한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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