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는 정의와 함께할 때 가장 효과…지도자 책임있는 행동도 중요”[논설위원의 단도직입]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우울증을 비롯한 기분장애와 자살 예방, 트라우마 인지치료 연구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았다. 한국형 표준자살예방프로그램 ‘보고듣고말하기’ 개발에 참여했으며, 자살률을 낮추기 위한 활발한 활동으로 201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장과 한국자살예방협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2019년 진료 도중 불의의 사고로 숨진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오랜 친구로, 임 교수가 의사자로 인정받도록 발벗고 뛰었다.
“재난을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
사회시스템을 만들어가는 한편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공동체를 회복하는 게 선진국
지난 6일 아침, 서울광장 한쪽에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의 흰 천막이 주황색 띠를 침묵처럼 두른 채 철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난 것은 국가애도기간뿐이다. 유가족과 생존자, 목격자들, 그리고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시민들이 겪어내야 할 고통은 이제 시작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태원 참사가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회장인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이날 서울 중구 한국자살예방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백 교수는 “재난을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공동체를 회복하는 게 선진국”이라며 “치유는 정의와 함께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 156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의 부상자와 유가족, 구조활동에 참여한 공무원과 시민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죄책감, 수면장애를 비롯한 증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때보다 트라우마가 더 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태원 참사는 기존 국내에 없던 재난 형태입니다. 인명피해가 큰 대표적 재난은 육지와 떨어진 바다에서 발생하는 해상사고였는데, 이태원 참사의 경우 접근성 높은 도심에서 사건이 발생해 생존자와 목격자, 구조에 참여한 분들까지 최대 1만명이 노출된 것으로 추산됩니다. 대개 자연재해는 지역 공동체가 모두 경험하고 영향을 받는 특징이 있지만, 이번에는 한 지역 안에서도 누군가 사망하는 상황을 미처 모른 채 또 다른 누군가는 축제를 계속했어요.”
- 사건 초기 현장 영상이 온라인을 통해 여과 없이 확산되면서 간접 경험한 시민들의 충격도 상당합니다.
“트라우마 진단기준이 만들어진 1980년대엔 재난의 간접 경험이란 기껏해야 흑백TV 영상이나 신문 보도사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화질 영상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알고리즘에 따라 스마트폰 화면에 등장합니다. 국민들이 상당한 간접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게 된 환경입니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몸과 마음에 위협이 되는 상황과 사건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 문제를 일으킨다. PTSD 연구 권위자인 베셀 반 데어 콜크 박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공포의 기억, 나약함과 취약함이 맞닥뜨려야 했던 수치심을 안고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외상적 경험은 마음과 감정에도 흔적을 남기고, 즐거움과 친밀함을 느끼는 능력에도 영향을 주며, 심지어 생물학적인 특성과 면역체계에도 자국을 남긴다”고 말했다.
- 구조활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더 살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트라우마 반응을 보이는 게 안타깝습니다.
“며칠 전 서울시 합동분향소에서 참사 당일 구조활동에 참여하셨던 시민을 만났습니다. 이틀 뒤부터 밤에는 불면과 악몽, 낮에는 ‘나에게 산소를 달라’는 환청에 시달리다가 귀갓길 만원버스에서 공황발작이 나타나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합니다. 신체적인 평가를 비롯해 비용이 적잖게 발생했다고 해요. 이렇게 생명을 살리려고 나선 의인에게조차 국가가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후유증을 겪게 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현장 구조 참가자와 재난을 경험한 목격자들의 명단조차 정부에 없을 겁니다. 이분들은 ‘더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치료를 비롯한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초기에 익명 검사 조치를 했던 것처럼 정신건강 평가 등을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내야 합니다.”
- 트라우마 반응은 뒤늦게 나타나기도 해서 삼풍백화점 참사 생존자의 경우 사건 10년 뒤에 폭발했다고 합니다.
“비정상적 재난 직후 엄청난 고통과 슬픔은 정상 반응입니다. 일주일 넘어도 고통과 불안이 계속되면 급성 스트레스 장애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한 달이 넘으면 PTSD로 진단하는데, 특징 중 하나가 그 같은 ‘지연된 반응’입니다. 기억과 감정이 연결되지 않은 채 은폐돼 있다가 비슷한 경험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따른 기억상실 발생 비율은 19~38%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된다.
- 이태원 참사 같은 인적 재난은 태풍·지진 같은 자연재난에 비해 피해자들의 고통이 더 크다죠.
“왜 그것을 막지 못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권력이 조직적으로 진실을 은폐하거나 침묵을 강요할 경우 고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오래간다는 점도 꼽힙니다. 125명이 사망하고 이재민 4000명이 발생한 미국 버펄로 댐 참사(1972년) 당시 책임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지역갈등이 심화되고 주민들의 트라우마 반응이 만성화됐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왜 그것을 막지 못했느냐 의문에
인재가 자연재난보다 더 큰 고통
권력의 진실 은폐나 침묵 강요 땐
고통 상상 초월할 정도로 오래가
- 참사 이후 사회의 대처가 중요한 것이군요.
“치유는 정의와 함께할 때 가장 효과적입니다. 선진국은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가 아닙니다. 재난을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슬픔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억하는 노력을 하며 공동체 회복의 길로 나아가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은 공동체의 지도자가 책임 있는 행동으로 잘 이끌어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본의 경우 백신사고로 어린이들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정부 후속대책을 마련한 바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유가족들이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너희들의 희생 덕에 우리 사회와 다른 아이들이 좀 더 안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었을 때 가장 치유적이었다고 합니다.”
- 참사를 기억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장소에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고, 위령탑은 5㎞ 밖으로 밀려난 게 상징적인 사례죠.
“가해자들은 재난을 망각하고 싶어 합니다. 갈등과 은폐를 조장하면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억압해왔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기억을 잊고 싶은 피해자들은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사회가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며 지난 70년간 빠른 경제발전을 추구하던 시기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를 비롯한 수많은 재난의 고통은 상당 기간 피해자와 가족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핵가족·1인 가구화가 심화되면서 더 이상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2018년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정식으로 문을 열고 제주4·3트라우마센터,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 등이 설립된 배경입니다.”
-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도 ‘놀러가서 죽은 건데 내가 왜 애도해야 하냐’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은폐하려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끔찍한 진실을 이야기할 때 그에 수반되는 불안, 우울, 분노의 감정을 피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이유일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직면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함께 고통을 직시하고 그때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복기하며 대책을 세우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과정이 선순환을 이룰 때 가장 성숙한 방식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이 시기에는 괴롭더라도 그 진실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고통에 공감하고 사회적으로 해결책을 찾아가면서 서로를 보듬을 때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거네요.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세우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애도와 결코 배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트라우마 후유증이 덜 남고,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할 일이 없게 됩니다.”
-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 감수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지자체에서는 재난 이후 위기 커뮤니케이션에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소통하는 방식을 별도로 교육합니다. 재난대응 매뉴얼의 3분의 1이 위기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내용일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는 과연 안전한가, 또 정부를 믿을 수 있느냐는 믿음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재난상황 위기’가 리더의 잘못으로 ‘재난관리의 위기’로 가면 안 되거든요. 리더는 시민과 함께 슬퍼하고, 공감하고, 때로 나쁜 소식도 전하면서 잘못이 있으면 즉각 사과해야 합니다.”
세월호 세대는 두 차례의 참사로
기성세대 불신 더 커질까 우려
감정의 역기능보다 순기능 이용
사회 좀 더 안전하게 만들었으면
- 이번 참사의 피해자 대부분이 세월호 참사 때 또래를 잃은 ‘세월호 세대’입니다. 한 세대 전체가 불행한 경험을 두 차례나 겪게 돼 걱정입니다.
“저는 20대 아들 둘을 뒀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8년간 뭐가 나아졌느냐고 묻는다면 기성세대이자 부모세대로서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삶을 누리려던 젊은이들에게 또다시 참사가 닥쳤습니다. 이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질까 우려됩니다. 꼭 20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재난은 분노, 우울, 혐오라는 감정반응을 가져옵니다. 분노의 순기능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혔던 것처럼 사회정의를 세우는 힘의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울 때문에 현실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게 됩니다. 혐오는 무섭고 더러운 것을 피하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각각의 감정의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을 이용해 사회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태원 유가족 극도의 스트레스
일반적인 위로와는 달라야 마땅
구조활동 의인들도 트라우마
정부서 지원 메시지 반복적 내야”
- 이번 재난을 경험한 이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이나 지인일 경우 스트레스 지수 최고치인 100점, 그러니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는 중입니다. 일반적인 위로와는 달라야 합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래도 남은 가족 챙겨야지’ ‘다 좋아질 겁니다’ 이런 것들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전혀 모르고 있구나라는 느낌으로 다가오기 십상입니다.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말이 제일 도움 됩니다. 지금은 유가족의 애도 방식을 존중해야 합니다.”
- 현재 정부의 트라우마 지원은 충분합니까.
“지난 4일 정부가 원스톱 지원센터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정신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 보건복지부 상담전화(1577-0199)를 통해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로 연결 가능합니다. 평소보다 전화량이 3배가량 늘면서 응대율이 떨어지고 통화 연결이 어려워진 터라 회선을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 지원 발표로 악플 달리며 유족들에 2차 가해…돈 얘기는 삼가야
“유족들 마음 나아지려다 댓글 하나에 무너질 수도…보상 언급 방식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
이태원 참사 이틀 뒤인 지난달 31일 정부는 ‘사망자에게 위로금 2000만원, 장례비 최대 1500만원 지급’ 지원 대책을 내놨다. 책임있는 당국자 누구도 공식 사과를 하지 않은 시점에 불쑥 돈 얘기부터 꺼낸 것이다. 기사에 “죽음은 안타깝지만 왜 놀다가 죽은 이에게 내 세금을 주느냐”는 악성 댓글들이 달렸다. 정부 발표가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한 2차 가해를 야기한 격이됐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정부가 피해 보상 여부나 액수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관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2001년 9·11 테러로 남편을 잃은 유족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정신과 치료비용은 보건복지부 관할하에 평생 무료로 지원되고 테러 피해에 따른 배상은 법무부 관할로 장기간 조사와 협의를 통해 지급됐지만 어느 매체도 액수에 대해 기사화하지 않았다고 들었다”면서 “한국에서는 금액이 언론에 보도된다고 하자 놀라워하더라”라고 말했다.
영국의 경우 살인 범죄 사망자의 유족에게 국가가 최대 10억원을 지원하는데, “국민의 안전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해 발생한 불행에 대해 배상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세월호 참사 유족에게 국가가 지급한 액수가 공개되면서 분위기가 급변한 바 있다. 심지어 정부 관계자들이 상실감에 빠진 유족들을 대상으로 위자료 지급에 조속하게 합의하라며 회유한 사실도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유족에 대한 존중이나 함께 애도하는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다.
백 교수는 “트라우마 치료로 겨우 나아졌던 이들의 마음이 댓글 하나에 무너지기도 한다”면서 “트라우마는 내가 겪을 수도, 내 이웃이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제는 참사 이후의 보상을 언급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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