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신형철 “반복되다가 조금씩 변화··· 詩와 우리 인생이 닮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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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공무도하가’부터
최승자·박준 시인까지
시 25편 비평 에세이 실어
“시는 우리 인생의 목소리”
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실린 평론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로 그는 단숨에 비평의 예술적 광휘를 획득했고, 2008년 첫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는 중심부에서 빛이 퍼지듯 독자의 얼굴을 비추며 매혹적 글의 정수로 통했다. 이후 그의 저서는 매번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올랐다.
신 평론가의 다섯 번째 신간 ‘인생의 역사’(난다 펴냄)가 출간됐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의 ‘묘법 No.220411’을 표지 삼은 이 책은 일주일 만에 이미 2만부 팔리며 종합 베스트셀러에 안착했다.
만추의 계절, 서울대 영문과 2동 411호에 새로 자리잡은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신형철 시화(詩話)’란 부제에서 짐작되듯이 이번 책 ‘인생의 역사’의 주제는 시다. 고대 가요 ‘공무도하가’와 신약성경의 ‘욥기’를 시작으로 다면체적 인간의 표정을 다룬 글 25편을 담았다.
신 평론가는 시를 “인생의 육성”으로 은유하며 책을 연다.
“인생의 감정이 시라는 장르에 응어리져 있기도 하지만 내용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시와 인생은 서로 닮았어요. 시는 걸어가다는 뜻의 행(行)과 이어지다는 뜻의 연(聯)으로 이뤄지잖아요. 걸어가고 이어진 자리에 마디가 생겨나죠. 삶도 이와 같아서, 인생이란 7개, 8개의 연으로 된 시가 아닐까 해요. 시는 또 정형적인 반복과 그 안에서의 변화가 발견되기도 하죠. 변함없이 반복되면서 동시에 조금씩 바뀌는 것, 그것이 인생이니 시와 닮았어요.”
신 평론가의 여정은 셰익스피어와 릴케, 에이드리언 리치와 메리 올리버, 황동규·황지우·이성복·이영광·나희덕을 지나 박준에 이른다. 최승자에 관한 글이 두 편이니 그의 애정을 가늠할 만하다.
특히 소설가 한강의 시 ‘서시’를 다룬 글 ‘운명이여, 안녕’을 읽다 심연에 금이 쩍 갈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이가 한둘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곁에 앉아 ‘나’에게 말을 붙인다는 설정을 가진 독특한 목소리의 작품이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의 마지막 5부에 담긴 시예요. 운명이 ‘나’와 평등하게 의인화되는 시인데, 만약 시처럼 자신의 운명이 다가와 ‘내가 네 운명이란다’라고 묻는 상황을 상상하게 되죠. 자기 운명과 평등하게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아마 닮은 부분, 못난 부분을 찾아볼 것 같아요. 제가 만든 대로 운명이 만들어졌을지, 그 반대일지.”
예술, 윤리, 비평은 신 평론가가 동시적으로 붙잡는 화두다.
그의 글을 오래 따라읽은 독자라면 이번 책 작가소개에 추가된 한 줄 문장에 이르러 멈칫하게 된다. ‘관심사는 예술의 윤리적 역량, 윤리의 비평적 역량, 비평의 예술적 역량이다.’
“예술의 윤리적 역량이란 예술이 가진 일종의 질문을 함의해요. 예술은 질문을 던지는 장르이고, 시인도 누구나 쓰는 언어를 가지고 아무도 편히 물을 수 없는 질문을 해내는 사람이에요. 윤리의 비평적 역량이란 예술이 공적인 이슈와 토론 의제가 됨을 뜻하고, 비평의 예술적 역량은 비평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적은 말이고요.”
그래서인지 신 평론가의 글은 비평이란 형식의 글 안에 고립되지 않는다.
2014년부터 8년 반 동안 재직했던 광주 조선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올 가을 서울대 영문과(비교문학 전공)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비교문학연습1’ 수업에서 대학원생 20명과 애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이태원 참사 고통의 잔상이 그의 얼굴에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윤리학적 비평 개념 가운데 지난주 ‘애도’에 관한 글을 강의했고 내일 ‘죄책감’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무거워 내일 한 번 더 애도를 더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됐어요. 애도에 관한 이론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덮고 잊고 닥치는 것이 아니라 열고 떠올리고 대화해야 해요. 바닥에 닿을 때까지, 그래야 그 바닥을 짚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죠.”
시간이 흘러 지금 신 평론가의 화두는 ‘문학 연구에서 포스트크리틱(postcritique)으로의 전환’이다.
명저 ‘근대성의 젠더’를 쓴 리타 펠스키, 프랑스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와 같은 학자들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비평 너머의 세계를 예견해 왔다고 그는 강조한다.
“비판적 에너지로 세계의 배후를 캐고 이면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징후를 캐치하던 비평은 이제 자리를 계속 차지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비평하는 후배들도 아마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거예요. 현장 담론하다 보면 근원적인 걸 하기 어려우니까요.”
그의 모든 독자가 가장 궁금해 하는 질문은 아마도 ‘신형철의 두 번째 평론집은 언제 나올까’가 아닐까. 신 평론가는 웃으며 “책 출간연도는 최소 3년 뒤”라고 못을 박았다.
“2025년이 등단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요. 책도 하나의 건물인데 뼈대는 있지만 지금 입점이 안 된 상태여서 당분간은 다른 글은 안 쓰고 평론집에 들어갈 글과 논문에 집중하려고 해요. 3년 뒤에는 털어버리고 싶어요.”
테이블 하나와 의자 하나가 가구의 전부인 연구실. 이사가 시작되지 못해 아직 책장이 없는 이곳의 사방 벽은 그가 매일 들여다보는 백지처럼 흰색 페인트가 이제 막 마른 터였다.
조만간 그곳엔 자기를 주장하는 책들이 함성 없이 쌓일 것이고, 흰 벽에 손때가 타며 시간에 익어가는 동안 그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책들에 ‘가치의 질서’를 정해줄 것이다.
“살아보지 않은 삶을 꿰뚫어보는 게 인생의 천재일 텐데, 그런 점에서 문학에는 인생의 천재가 있을 수 없어요. 자기가 살아온 삶밖에 없으니까요. 문학은 미술이나 음악과 다르게 경험적인 자산으로부터 분리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삶에 변화가 생기면 글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문학이란 이처럼 삶의 변화 속에서 꾸준히 재발견되고 다시 읽게 되는 무엇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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