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고 슬픈 것들도 그냥 그것과 놀아야 그래야 이길 수 있어”
선불교 한 장면 같은 ‘무슨 말씀’
팬데믹 파고 못 넘고 문닫은 단골식당
선문답 주고받듯 셰프와 ‘무언의 대화’
영양과잉 꼬집은 ‘그리운 시장기’
너무 자주 많이 먹으면서 비만 많아져
공복 상태의 신선함은 굶어봐야 알아
10여년 전부터 광화문 근처에 있는 한 에코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친환경 유기농 농산물을 재료로 사용했고, 조미료도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더구나 주인이자 셰프인 김미숙씨는 시 애호가로 늘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을 내왔다. 시인 정현종은 식당이 편해서 친구나 제자들과 함께 자주 찾았다. 혼자도 가끔 왔다.
셰프가 시인에게 무슨 말씀이라도 들려달라고 묻고 이에 말없이 밥 먹는 모습으로 화답하는 시인의 모습은 이심전심으로 진리를 전하는 선불교와 닮아 있다. 예컨대, 임제 선사가 제자의 멱살을 부여잡고 뺨을 후려쳐서 순식간에 진리를 보게 한 다음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니까 어느 날 임제의 한 상좌가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임제는 선상에 내려서더니 갑자기 한 손으로 상좌의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 뺨을 후려치며 떠밀쳐 버렸다. 상좌는 벼락같은 사태에 망연자실했다. 이때 옆에 있던 승려가 말했다. 상좌는 어찌 스승님에게 예배하지 않으시오? 상좌는 임제에게 절을 하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벼락같은 사태에 모든 흐름이 순간 끊기고 만기가 사라진 진리의 순간을….
―시 ‘무슨 말씀’은 마치 선불교의 한 장면 같은데.
“쓴 그대로다. 전혀 어려울 게 없는 작품이다. 식당은 코로나 때문에 2년 전 문을 닫았다. 한 10년쯤 다녔는데,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실제 시와 같은 대화와 소통이 있었던 것인가) 진짜로 저렇게 했는지, 아니면 시만 그렇게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실제 그런 대화가 오고간 게 아니라 시만 그렇게 썼을 거다.”
시 ‘끝’ 역시 세상은 무이자 공으로 결국 마음 하나뿐이라는 불교의 지혜를 담은 작품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끝이라고 하지만/ 언제가 끝인가요./ 끝이라고 하지만/ 어디가 끝인가요./ 이때 저때가 다 끝이고/ 여기저기가 다 끝인 줄 아오나,/ 그렇기는 하오나,/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요,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끝’ 전문)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이 오묘한 것 같다.
“특별히 할 얘기가 없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제가 지금 80세가 넘었다. 나이 드는 것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짐작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시 ‘놀다’는 사람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어떤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놀다’ 전문)
―짧지만 깊은 삶의 통찰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문득 그냥 써져서 쓴 시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것들, 예를 들면 괴롭고, 슬프고, 싫은 것들도 그냥 그것과 놀아야 되지 않느냐. 그래야 이길 수 있고, 버틸 수 있으며, 극복할 수 있다. 너무 많이 알려져 진부한 말처럼 됐지만,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도 있다.”
“모든 생명은 포옹이나 사랑 속에서 싹트고 태어나는데, 그냥 느낌대로 쓴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고 모든 생명이 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태어나니까.”
‘그리운 시장기’는 어느 순간 잃어버린 시장기를 통해 영양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을 걱정해야 하는 현대를 꼬집는 시편이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배가 고팠고, 그래서/ 음식도 맛있었는데,/ 요새는 배고플 새가 없으니/ 이게 실은 문제이다.//… 시장기를 느낄 때 우리는/ 얼마나 신선한가!/ 시장기를 느끼는 순간/ 살맛이 나고,/ 텅 빈 위장이/ 세계도 텅 비게 하여/ 세계는 얼마나 광활해지는가!/ 즉시 어디에라도 갈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모험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거두절미, 신선한 기운이 샘솟는다./ 좀 굶어야겠다,/ 그리운 시장기여.”(‘그리운 시장기’ 부문)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언젠가 지방에서 제가 상을 받는 시상식이 열렸는데, 저녁을 늦게 먹게 됐다. 저녁 시간이 지나니까 배가 아주 고팠다. 근데, 그 시장기가 신선하고 좋았다. 시장기를 느낀 게 오래간만이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자주, 많이 먹으면서 비만도 많아졌다. 공복 상태가 얼마나 신선한지는 굶어봐야 안다. 조금 진부할 수도 있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비우는 것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고, 물질적 풍요와 연관시켜 말할 수도 있다. 좀 덜 갖고 덜 먹는, 덜이 주는 건강함, 신선한 느낌,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현종은 1965년 ‘현대문학’에 박두진 시인의 3회 추천을 완료해 문단에 데뷔했다.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래 시집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갈증이며 샘물인’ ‘광휘의 속삭임’ 등을 펴냈다. 한국문학작가상을 비롯해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파블로 네루다 메달 등을 받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철역 쪽으로 하얀 광휘를 이고 가는 노 시인을 바라봤다. 오래전 정년퇴직한 터라 한없이 자유롭다고 말했는데,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시계처럼 살면서도 세상 이치에 달관한 독일 철학자가…. 새벽 5시쯤 일어나고, 괴로움이 닥쳐오면 괴로움과 놀고, 매일 아침 아파트 맞은편에 위치한 중앙박물관을 산책하고, 노는 게 싫증나면 싫증하고 놀고,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산책을 다녀오고, 슬픔이 몰려오면 슬픔과도 놀고, 밤 9시쯤엔 스르르 눈을 감고….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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