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노래 만든 거 없수?”…김광석 물음에 ‘하늘’로 화답

강성만 2022. 11. 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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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노래이야기집 펴낸 민중가요 작곡가 이성지씨
“추모곡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만든 게 가장 큰 보람”
민중음악 작곡가 이성지씨가 지난 4일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지난 1998년부터 서울 대치동이나 목동 학원가에서 과학을 가르쳐 온 이성지(본명 이창학)씨는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이다. 뇌성마비 증상으로 어려서부터 잘 걷지 못했고 나이가 들면서 증상이 심해져 대략 10년 전부터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단다.

1981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 들어간 뒤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한 그는 민중가요 중 대표적인 추모곡인 ‘벗이여 해방이 온다’ 작곡자로도 유명하다. 이 노래는 그가 대학을 나와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래분과 ‘새벽’에서 활동하던 1986년에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가 전방 입소 훈련을 반대하며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한의 슬픔 속에 만들었다.

1987년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1995년 동부 명문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핵물리 실험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뒤에는 우연히 대치동 학원가에 자리 잡으며 한때 강사 60~70명을 둔 과학전문 학원을 20년 가까이 운영했다.

최근 그가 만든 노래 22곡에 담긴 사연을 풀어 지난 인생을 돌아본 책 <내노래가 그대에게-‘벗이여 해방이 온다’ 이성지의 40년 노래 이야기>(건강미디어협동조합)를 펴낸 저자를 지난 4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이 책과 함께 지난 10여 년간 만든 노래 14곡으로 2집 앨범 <조경옥, 이성지-내 노래가 그대에게>도 냈다. 모든 곡을 그의 메아리 선배인 조경옥씨가 불렀다.

<내 노래가 그대에게> 표지.

그의 노래에는 유독 추모곡이 많다. 1988년 미국에서 만든 ‘그대 진달래 되누나’는 그해 통일과 민주를 외치며 스러진 조성만 열사를 기리는 노래이고 6년 전 만든 ‘타인의 고통’은 박종철 열사 추모사업회 의뢰로 만든 열사의 공식 추모곡이다. ‘잊지 않을게’는 세월호 희생자 고 박예슬양의 2014년 7월 유고작 개인전 때 그가 만들어 직접 불렀다.

왜 추모곡일까? “80년대 노래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관점이 달랐어요. 저는 노래를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노래는 예술가 개인의 표현이며 작가의 느낌을 솔직하게 드러내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봤어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가 대표적이죠. 김세진·이재호의 죽음을 접하고 너무 충격을 받아 슬픔을 가누지 못해 며칠 헤맸어요. 그들의 마지막을 상상하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미안하고 저 자신이 창피해서요. 그 순간 노래라도 써야 할 것 같더군요. 저한테는 가장 절실한 감정이었죠. 조성만 투신 소식도 유학 중 한인 신문에서 뒤늦게 읽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어요. 예슬이도 포스터의 표정이 너무 맑더군요. 그게 오히려 슬펐죠. 포스터를 보지 않았다면 노래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저에게 노래는 격하게 분출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죠.”

그는 고교 시절 “뭔가 맞아 떨어지고 예상할 수 있어서” 물리에 강하게 끌렸으나 부모님은 장애인 아들의 장래를 걱정해 의대를 권했단다. 그 타협점이 공대 진학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시작한 대학원에서 물리를 전공했다.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물리를 공부해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유학했어요. 그 전에 소비에트 유물론 철학을 공부한 것도 영향이 있었죠. 거기에 ‘양질 전화의 법칙’ 같은 게 나오잖아요. 물리는 철학의 기본이죠.” 하지만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면서 물리에 흥미를 잃었단다. “논문 연구에 들어가니 공부가 생업이더군요. 연구 주제도 저의 노동력이 있어야 하는 교수의 급여 지급 가능성으로 결정됐죠. 마침 대학에 ‘저에너지 중이온 가속기’가 있어서, 원자핵이 어떤 생성물로 분해되어 가는지를 연구했는데 세계를 해석하려는 거대담론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제가 학문에 대해 쓸데없는 환상을 가졌던 거죠.”

1981년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활동
1986년 김세진·이재호 죽음 ‘애도’
미국 유학 박사…20여 년 학원 운영
“교수 포기했지만 제자들 많아 뿌듯”

작곡 인생 40년 ‘내 노래가 그대에게’
“장애로 서툰 감정 표현 노래로 소통”

1997년 귀국한 그가 교수가 아닌 학원 강사의 길로 나간 데는 유학 중 친해진 80년대 장애인 학생운동가이자 대학 선배인 최민씨 영향이 컸단다. 서울대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그무렵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던 최씨의 제안으로 주말이면 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치다 2000년 아예 학원을 인수했다. “민이 형이 학원 적자가 심하다며 저한테 넘기든지 아니면 문을 닫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1년 정도만 기다리면 교수 임용이 될 것 같아 갈등이 심했죠. 하지만 폐업 만은 막아달라는 동료 강사들과 직원들 바람을 모른 체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시작해 한때는 대치동과 목동, 중계동, 일산 4곳에서 학원을 꾸렸던 그는 지난 3월 학원을 정리하고 지금은 강사로만 전념하고 있다. 22년 전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하자 그는 “교수가 되지 않은 게 잘 됐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지금 지방대를 보면 대학원에 학생이 없어 제대로 연구할 수도 없잖아요. 제가 학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은 주로 과학고 재학생이나 지망생입니다. 이해 정도나 속도가 뛰어나 저도 물리를 계속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학원에 가기 전 몸이 힘들어도 수업만 들어가면 피곤이 사라져요. 이 일이 천성 같아요.” 그는 제자 중 100명 가까이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수상했고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로 재직 중인 제자도 있다고 했다.

그는 유학 중에도 ‘뉴욕 우리문화찾기회’ 창단 공연(1990)을 이끌고, 이 단체 정책실장을 맡아 문화 행사를 여는 등 노래운동과의 연을 놓지 않았다. 그의 노래 ‘망월동, 1993년 여름’(1993)은 방학 때 잠시 귀국해 들른 광주 망월동 윤상원 열사 묘지 앞에서 “엉엉 통곡을 한” 뒤 만들었고 ‘하늘’(1995)은 노래운동 후배 고 김광석이 세상을 뜨기 몇 달 전 뉴욕에서 만나 “형, 노래 만든 것 없수?”라고 한 물음에 화답해 만들었다. 이 곡은 결국 김광석에게 전해지지 못 하고 그가 2005년에 낸 첫 앨범 <회상하기(Reminiscence) 80'S: 작곡가 이성지 노래모음집>에 메아리 후배 이자람 목소리로 수록됐다.

그는 책에서 첫 노래 ‘부활하는 산하’(1985)가 공연 한달쯤 만에 신촌역 근처 선술집에서 대학생들 떼창으로 불리는 것을 들었을 때 오싹했던 소름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썼다. 세상 태어나 제일 잘 한 게 지금은 장성한 두 아이를 낳아 키운 것과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쓴 것이라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노래란 뭔지 물었다. “세상과 하는 대화이죠. 어려서부터 장애 때문에 ‘다리 병신’이라는 놀림을 많이 받아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컸어요. 대중 앞에 서는 공포도 있고요. 대화할 때도 자기 표현을 잘 못 하는 편입니다. 노래를 쓰면서 제 이야기를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거죠. 노래는 세상과 소통하는 중요한 창구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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