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히어로] 1승도 없던 팀을 4강으로 이끈 '괴팍한 마법사' 스토이치코프

김형중 2022. 11. 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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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마크 도일, 김형중 기자 =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94 미국 월드컵 때 그는 "이 이름을 가진 자는 하늘 위에 한 분이 계시고, 아래에 또 한 사람이 있다. 아래에 있는 사람은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종교적으로 보면 탐탁지 않은 이야기지만, 진짜 기적은 일어났다. 불가리아는 그해 여름 미국에서 폭발했고 스토이치코프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니었다. 다만 스토이치코프에겐 분노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 분노는 노력이 되어 프로 선수로서의 정점을 찍게 해주기도 했지만,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자랐습니다. 거기서도 배울 것이 있더군요"

사실 그의 커리어는 일찍 끝날 뻔했다. 10대였던 CSKA 소피아 시절 불가리안 컵 결승에서 대규모 집단 몸싸움 사태에 휘말렸다. 영구 제명의 위기에 놓였지만 징계가 줄어들었다. 이를 계기로 반등을 준비했다. 그는 1989년 리그 30경기에 나서 38골을 터트리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차지했다. 캄프 누에서 열린 컵 위너스컵 결승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골을 터트렸다. 덕분에 그는 요한 크루이프 감독의 부름을 받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됐다.

하지만 이적 직후 큰 사건에 직면한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수페르코파 엘 클라시코에서 그는 주심의 발을 의도적으로 밟아 퇴장 당했다. 6개월 출전 정지 처분이 예상되었지만 10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심기일전하여 1992년 웸블리에서 열린 유러피안컵 결승에서 바르셀로나에 첫 우승 트로피를 안기고, 4회 연속 라리가 우승컵을 선사했다.


무시무시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특히 왼발 능력은 그의 성질만큼 월드 클래스였다. 득점도 잘하는 선수였지만 바르셀로나 시절 브라질 출신 단짝 호마리우에게 수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기도 했다.

불가리아 대표팀의 전성기도 이끌었다. 1994 미국 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프랑스와의 1993년 11월에 열린 마지막 승부에서 그의 라커룸 팀 토크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전설이다.

"에릭 칸토나가 나보다 잘 할까? 다비드 지놀라가 레치코프보다 강할까? 서류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피치 위에선 우리가 낫다!"

이 팀 토크로 잔뜩 기세가 오른 불가리아 선수들은 파리에 위치한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프랑스 축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는 장면을 만들었다. 에밀 코스타디노프가 후반 추가시간 극적인 결승골을 터트리며 불가리아에 월드컵 출전권을 선사했다. 스토이치코프를 비롯한 모든 선수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고,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48경기 24골을 터트리며 최고의 시즌을 보낸 뒤 월드컵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93/94시즌 바르셀로나는 아쉬운 결말을 맞는다. AC밀란을 상대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토이치코프는 자신의 커리어의 하이라이트가 될 미국 월드컵을 준비했다. "피치 위에서 더 잘 하는 것이 내 원칙이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월드컵에 첫 출전한 나이지리아와의 조별예선 1차전에서 불가리아는 0-3으로 대패를 당했다. 충격에 빠졌지만 금세 가다듬고 그리스와의 2차전에서 4-0으로 승리했다. 스토이치코프는 두 번의 페널티킥을 깔끔히 성공했다. 이어 16강 진출을 판가름할 아르헨티나와의 3차전에서 스토이치코프의 결승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하며 이변을 연출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마라도나는 약물 검사 양성 반응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스토이치코프는 마라도나의 상황에 대해 "내가 곁에 있어줄 것"이라고 감쌌다. 한편, 이전 월드컵까지 1승도 챙기지 못했던 불가리아는 스토이치코프의 활약 덕분에 토너먼트 진출에도 성공했다.


뉴저지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16강전에서도 스토이치코프는 선제골을 터트렸다. 1-1로 비긴 후 승부차기 끝에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어 독일과의 8강전에서도 그의 마법은 통했다. 마라도나를 연상시키는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터트린 후 레치코프의 헤더 결승골을 돕는 어시스트도 기록하며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침몰시키고 4강에 올랐다.

하지만 더 이상의 기적은 없었다. 이탈리아를 만난 4강전에서 불가리아는 로베르토 바지오에게 이른 시간 2골을 허용하며 끌려갔고, 스토이치코프가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고, 3-4위전에서도 동기부여가 떨어진 불가리아는 스웨덴에 0-4로 패하며 대회를 마감했다.

스토이치코프는 6골을 터트리며 러시아 올레그 살렌코와 공동 득점왕(골든 부트)를 수상했고, 이같은 활약으로 바지오를 제치고 1994년 발롱도르를 따냈다. 그는 "이것으로 신은 불가리안임이 증명됐다"라며 기쁨을 나타냈다.

물론 그가 선수 생활 말년에 미국에서 상대 선수 다리를 부러트리며 고소를 당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20대 초반 불가리안컵 결승전 집단 몸싸움에 가담했던 일로 지금까지 비판 받기도 한다.

"하나만 말해 줄게요. 내 머리가 검든 하얗든, 그 미친 소년은 영원히 내 안에 살아갈 겁니다. 항상 그럴 거에요"

이렇듯 자신의 성격을 인정했지만,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는 않았다. 1994 월드컵 골든 부트를 수상하며 받은 상금을 소피아의 고아원에 기부했다. "제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힘든 시간이었지요. 전 불행의 무게를 알고, 아이들이 고통 받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토이치코프는 그의 이름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닮진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는 선수였다.

사진 = 골닷컴,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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