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마다 살리고 성숙시키는 그것
[[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 ‘풍류’라는 말
도를 배움은 집착이 없음이니, 인연 따라 이르는 곳에 노니네
푸른 학의 골짜기 잠시 떠나와, 흰 갈매기 오가는 물가에서 즐기네
몸 붙인 이 세상은 구름 천리요, 하늘땅은 바다의 한 모퉁이일세
초가집에 애오라지 하룻밤 붙이니, 매화와 달이 풍류로구나
이 시는 20살의 율곡 이이가 금강산 생활을 마치고, 승려 보응(普應)과 함께 내려오는 길에 지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지은 시이다. 초가집 마당에 교교한 달빛과 매화나무가 운치 있다. 푸른 학과 흰 갈매기, 산과 물가를 인연 따라 오가다 하룻밤 의탁한 초가집의 풍류로부터 유・불을 넘나들며 진리를 구하다 오늘 머문 자리를 즐기는 젊은 구도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풍류’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속된 일을 떠나서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 ‘음악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등으로 풀이되어 있다. 주변의 지인에게 “‘풍류(風流)’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느냐”고 물었더니, 지인은 청명한 가을밤에 유유자적 배 띄워 놓고 한가하게 길게 누어 그 풍치를 만끽하는 옛 선비의 멋스러움이 생각난다고 답했다. 또 얼마 전에는 <풍류대장-힙한 소리꾼들의 전쟁>(JTBC)이라는 퓨전음악 프로그램이 있었고, 전통음악을 연주하거나 전수하는 단체에서도 종종 ‘풍류’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면, 사전에 수록된 ‘풍류’의 뜻은 현대인의 ‘풍류’에 대한 이해가 잘 반영된 듯하다.
우리나라 고문헌을 모아 번역한 고전번역원 누리집에서 ‘풍류’를 검색해 보면, 그 결과가 대략 19000건에 이른다. 그만큼 ‘풍류’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서 흔하게 쓰여온 말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윤기(尹愭)는 ‘풍류’라는 글을 지어, “상고시대에는 풍류의 이름은 없어도 풍류의 실상이 있었는데, 오늘날은 풍류의 이름만 있고 풍류의 실상이 없다”고 개탄하였다. 또 그는 “요즘의 풍류는 남보다 풍치가 뛰어난 것을 말하는데, 이것도 풍류는 풍류지만 고대의 풍류와는 멀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태고의 풍류는 봄바람이 불면 만물이 모두 창성하는 것과 같이, 저마다 각각의 천성에 맞는 편안함을 얻어 화락하고 태평하였으니 이것이 최고의 풍류”라고 하였다.
그러면 ‘풍류’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였고, 본래의 의미는 어떤 뜻이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6세기 신라 진흥왕이 화랑도를 창설하였는데, 이를 ‘풍월도’ ‘풍류도’라고도 불렀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데에서 ‘풍류’의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더불어 ‘풍류도’가 화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화랑들이 추구하였던 ‘풍류’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이는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최치원이다.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에서 우리는 ‘풍류’의 구체적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지금 21세기를 살면서, 고대의 ‘풍류’를 거론하는 것은 단군신화가 그러하듯이 ‘풍류’ 역시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밝히는 비전(vision)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삼교를 포함한다’와 ‘뭇 생명을 만나 변화시킨다’로 요약되는 풍류도의 핵심 내용은 생명을 살리는 인(仁)과 천지인 삼재의 인간론으로 요약되는 역(易)의 사유가 창조적으로 발휘된 결과로서 한국사상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해서이다.
◆ 풍류, 뭇 생명을 만나 변화하게 하는 사람의 이야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명(文名)을 날리기도 하였으나, ‘외로운 구름’이라는 호가 말해주듯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끝내 종적도 없이 모습을 감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학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며, 흥미롭게도 도교와 유교 양쪽에서 추앙받는다. 최치원은 한국 도교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동시에 유교의 도통을 계승하는 문묘(文廟)의 첫번째 자리에 배향된 인물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늘날 한국사상의 원형으로 평가되는 ‘풍류도’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조 편에 보면 ‘난랑비서(鸞郎碑序)’라는 글이 있다. ‘난랑비서’는 ‘난(鸞)’이라는 화랑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쓴 비문(碑文)의 서문이라는 뜻이다. 이 글을 쓴 이가 최치원으로, 그는 이 서문에서 ‘풍류’가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길지 않으므로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라에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는데, ‘풍류’라 한다. (풍류의)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갖추어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고 뭇 생명을 만나 변화시킨다(接化群生). 이를테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無爲)로써 일에 대처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이며,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것을 ‘풍류’라 부르며, ‘선사(仙史)’에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선사(仙史)가 책 이름이든 ‘선(仙)의 역사’란 뜻이든 어찌 되었거나 ‘사(史)’를 운운함을 볼 때 그 당시에도 이미 ‘풍류’의 도가 장구한 세월 이어져 왔음을 읽을 수 있다.
최치원이 보는 ‘풍류도’의 핵심은 ‘삼교를 포함한다’와 ‘뭇 생명을 만나 변화시킨다(接化群生)’에 있다. 여기에서 ‘삼교’는 유교・불교・도교를 말하는데, ‘삼교를 포함한다’는 것은 각각의 가르침이 배척되지 않고 하나로 융합했음을 뜻한다. 당시의 진리체계가 유・불・도였기에 삼교를 언급한 것이지 오늘의 시점이라면 굳이 삼교에 그칠 일이 아니다. 다섯이든 여섯이든 보편을 추구하는 진리체계는 모두 그에 포함될 수 있겠다. 이른바 ‘진리’를 표방하는 가르침들은 자칫 유일함과 독존을 내세우기 쉽다. 그에 반해 풍류도는 다양한 가르침의 회통을 지향하고, 그 융화의 방향이 ‘접화군생’이라는 변화의 창출에 있음을 말한다.
‘접(接)’이란 ‘만남’이다. 진정한 ‘만남’이란 무엇일까? 서로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가 지닌 존재의 미와 생명의 가치를 북돋워 주는 것, 풍류를 실천하는 이가 ‘뭇 생명들을 만나 변화시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일 터이다.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풍류도는 사람이 ‘만남’을 통하여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추구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풍류도는 모든 진리체계를 포함할 수 있고, 또 뭇 생명을 만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단서는 최치원의 다음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에게는 이방(異邦)이 없으니, 그래서 동인(東人)의 자손들이 불교도 하고 유교도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진감선사비>)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선언은 최치원 이전 공자에게서 이미 이루어진 내용이다. 공자는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니, 사람이 도를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가 없다”(<중용>)라고 하였다. 놀랍게도 ‘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인간해방’과 ‘인간성숙’에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최치원은 이러한 공자의 정신에 입각하여 오히려 신라인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선언한다. 우리가 진리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그 가르침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이다. 유교를 공부했다고 해서 유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유교를 넘어선다. 불교를 통해 불교를 넘어서며, 기독교를 통해 기독교를 넘어선다. ‘사람에게 이방(異邦)이 없다’는 말은 진리의 세계에서는 이방인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는 국경이 없다는 뜻이 되겠다. 진리란 특정 종족이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닌다. 그래서 ‘동인의 자손’ 즉 신라인들이 여러 이질적 가르침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결론이다. 풍류도는 이질적인 것, 대립 항들이 충돌하여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성숙하게 함으로써 “뭇 생명들을 만나서 변화시킨다”는 생의 철학을 담고 있다.
‘삼교(三敎)를 포함한다’는 말은 유·불·도가 들어온 뒤에 그것을 종합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불·도가 들어오기 이전에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풍류’라는 마음의 바탕, 문화적 바탕이 있었기에 ‘동인’은 다양한 진리체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하나로 융합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한국은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유명하다. 비록 ‘풍류’라는 말의 의미는 변천해 왔지만 우리 역사를 관류해 온 ‘풍류’ 정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닐까? 최치원은 이와 같은 풍류정신이 유·불·도 수용 이전에 이미 그 연원이 있었음을 ‘동인(東人)의 자손’이라는 말에 담아두었다고 생각된다. ‘동인의 자손’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또 한 보따리이므로, 다음 연재에 이어서 다루려 한다. 아울러 ‘주역’으로 풀어보는 풍류도 이야기도 그와 함께 풀어보겠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차기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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